[이명희의 인사이트] 왜 나인가요? 기사의 사진
‘연탄길’ 작가 이철환이 쓴 ‘행복한 고물상’에는 가난한 아버지 얘기가 나온다. 고물상을 하며 조금 모은 돈으로 식당을 차렸는데 실패하고 온 가족이 변두리 산동네로 이사를 간다. 동네 아이들이 다 떨어진 운동화를 보고 거지신발이라고 놀린다며 자식들은 불평을 하는데 아버지는 설상가상 오토바이에 부딪혀 팔에 깁스를 하고 집에서 쉬게 된다.

어느 날 이슥한 밤시간에 산동네에 비가 내리고 비바람이 세차게 몰아친다. 천장에서 비가 주룩주룩 새자 어머니는 빗물이 떨어지는 곳에 양동이를 받쳐놓으며 진작 지붕을 손 볼 걸 그랬다고 푸념한다. 아버지는 속이 상했는지 밖으로 나가버린다. 밤이 깊도록 아버지가 안 돌아오자 온 가족이 아버지를 찾아 나선다. 동네를 다 뒤져도 아버지를 찾지 못한 가족들은 집으로 오다 지붕 위쪽에 시커먼 물체를 발견했다. 깨어진 기와 위에서 빗물이 집 안으로 들이치지 않도록 한 손으로 우산을 붙들고 지붕을 막고 있었던 것이다.

연약한 세상의 아버지도 제 살붙이들을 이처럼 챙기는데 하물며 하나님의 사랑이야 어떠하겠는가. 우리는 짧은 세상을 살아가면서 돌부리에 채어 넘어지고 바닥 모를 늪에 빠질 때면 좌절한다. 행복에 겨울 때는 잊고 살았던 하나님을 찾으며 울부짖는다. ‘신은 어디 계신가’라고. 예기치 않은 참사로 갓 피지도 못한 어린 영혼들이 들림을 받을 때, 가장 사랑하는 이를 저세상으로 떠나보낼 때, 육신에 병고가 찾아왔을 때 절망하고 절규한다.

외아들을 교통사고로 잃은 박완서는 ‘한 말씀만 하소서’에서 “순전히 하느님에 대한 부정과 회의와 포악과 저주로 일관돼 있었다”며 “만일 그때 나에게 포악을 부리고 질문을 던질 수 있는 그분조차 안 계셨더라면 나는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적었다.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사랑 그 자체란 하느님이 그것밖에 안 되는 분이라니. 차라리 없는 게 낫다.’ ‘그저 만만한 건 신이었다. 온종일 신을 죽였다. 죽이고 또 죽이고 일백 번 고쳐 죽여도 죽일 여지가 남아 있는 신, 증오의 마지막 극치인 살의, 내 살의를 위해서도 당신은 있어야 해.’ 생때같은 자식을 잃고 몸부림치는 어미의 고통이 고스란히 전해진다.

“내가 이렇게 죽을 만큼 힘든데 왜 하나님은 눈 감고 모른 척하시나요?” “가시밭길을 헤매는데 냉정한 하나님은 왜 손길을 내밀지 않으시나요?” 우리는 인간인지라 한없이 의심하고 신의 존재를 숱하게 부정한다. 새벽닭이 울기 전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던 것처럼. 힘들 때마다 어느 목사님의 설교가 기억난다. 하나님은 우리가 가시밭길을 걸을 때 모른 척하시지 않았다고. 우리가 그 길을 걸을 때 주님 등에 업혀 있었기 때문에 덜 아프고, 덜 고통스러웠노라고. 그 아픔을 발끝으로 온전히 느끼며 우리를 업고 끝까지 내려놓지 않으신 분이 주님이라는 것이다.

‘웃는 목사’라는 별명을 가진 조엘 오스틴은 “하나님은 우리가 받은 고통과 상처, 온갖 학대와 슬픔을 빠짐없이 기억하셨다가 때가 되면 두 배나 큰 기쁨과 평화와 행복으로 갚아주신다.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라고 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시련에는 신성한 목적이 있다. 유혹과 시련이 찾아오는 이유는 우리가 영적으로 강해지고 성장하기 위해 그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 고통과 시련을 줘서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세상에 알린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아왔고 하나님께 다가가 주님을 닮고자 했던 암 투병 중인 선배에게, 사랑하는 이들을 갑자기 잃고 끝이 안 보이는 고통의 터널을 지나고 있는 이들에게, “왜 나한테만 이런 아픔이 닥치느냐”고 울부짖는 모든 이들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위로를 건넨다.

성경은 우리에게 가르친다.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 6:26, 30)

이명희 종교국 부국장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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