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선도 <15> 총각 신학생, 전농감리교회 담임으로 첫 목회

“사모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기도… 아버지 “아주 좋은 처자 있다”

[역경의 열매] 김선도 <15> 총각 신학생, 전농감리교회 담임으로 첫 목회 기사의 사진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오른쪽)가 1957년 감신대 4학년 졸업여행 때 충남 공주 동학사에서 홍현설 학장과 함께했다.
함장은 치고 들어오는 비바람을 온몸으로 맞으며 당당하게 서 있었다. 그는 쌍안경을 목에 걸고 어둠까지 집어삼킬 듯한 파도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외쳤다.

“Straight away! Straight away!(지체하지 말고 전진하라!)” 그 소리에 수병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아, 내 영혼의 선장도 이런 분이시겠구나. 그렇다. 눈앞에 펼쳐지는 현실이 중요한 게 아니다. 내 인생의 함장은 주님이다.’

눈앞에 펼쳐지는 아찔한 상황의 무게를 도리어 제압하는 함장의 기개를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일순간에 사라졌다. 나는 그날 내 영혼의 함장 되시는 예수께서 나를 구원의 방주에 태우시고 사명을 향해 계속 전진하라고 한 메시지를 들을 수 있었다.

나의 첫 목회지는 서울 청계천 근처 전농감리교회였다. 전농동은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동네였다. 교인 중에는 천막을 치고 사는 사람도 있었다. 천막 옆에는 호박과 고추, 상추를 엉성하게 심어 놓은 밭들이 있었다. 4학년 때 전도대 활동을 하다가 전농감리교회에서 전도집회를 한 적이 있었다. 개척한 지 4년이 안 된 교회였는데 40명 정도가 출석했다. 담임자를 구하다가 신학교 학생인 나를 데려오겠다고 한 것이다.

그때까지만 해도 감리교 목회자는 개교회 청빙이 아니라 감리사의 파송에 의해 결정되던 시기였다. 서울 변두리 교회이긴 하지만 40명 이상 모이는 교회는 11년차 정회원 목사 정도는 돼야 갈 수 있는 자리였다.

더욱이 결혼도 않은 총각 신학생 입장에선 엄두조차 낼 수 없는 자리였다. 그래서 난색을 표했다. “제가 부임할 자리가 아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전농감리교회의 중진들은 계속해서 요청해 왔고 지방회에서도 문제를 제기하지 않고 부임을 허락해 줬다.

1957년 나의 목회 인생은 그렇게 첫발을 내디뎠다. 목회를 시작하면서 처음 부닥친 문제는 결혼이었다. 총각이 담임 전도사로 온다니 몇몇 처녀가 있는 가정에서 관심을 보였다. 처녀의 어머니가 와서 빨래도 해 주고 다리미질도 해 줬다.

오얏나무 밑에서 갓을 바로 잡지 말고 오이 밭에서 신발을 고쳐 신지 말라고 했다.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었다. “집사님, 고맙고 감사하지만 앞으로 집안일은 제가 하겠습니다.”

내 나름대로 세운 원칙 중 하나는 목회지에서 연애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목회하면서 교회 안에서 연애했다는 소리는 추호도 듣기 싫었다.

하루는 혼자 심방을 다녀왔는데 목사관 안에 있던 책이 전부 사라지고 없었다. 누가 리어카를 갖고 와서 완전히 쓸어간 것이었다. 한편으론 씁쓸했지만 정작 내 입에서는 뜻밖의 간청이 나왔다. “이 집에 새사람이 들어오기는 해야겠구먼. 하나님, 이제 예비해 주신 배우자를 만나게 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사모를 허락하여 주십시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기도 응답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 통로는 강원도 철원 지방의 관인교회에서 목회를 하고 계시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어느 날부터 새벽 5시에 한 처녀가 외투를 둘러쓰고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교회 새벽기도에 나오는 걸 유심히 관찰하셨다고 했다. 성격이 서글서글하고 활발한 게 통 큰 사모감으로 보였다는 것이다. “선도야, 다른 생각하지 마라. 아주 좋은 처자가 있으니까.”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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