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전철]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 기사의 사진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명주실을 새로 사서 놓을 것을/쓰던 걸 놓아서 이리 되었을까/ 엄마가 다 늙어 낳아서 오래 품지도 못하고 빨리 낳았어/한 달이라도 더 품었으면 사주가 바뀌어 살았을까/엄마는 모든 걸 잘못한 죄인이다/몇 푼 더 벌어 보겠다고 일하느라 마지막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엄마가 부자가 아니라서 미안해/없는 집에 너같이 예쁜 애를 태어나게 해서 미안해/엄마가 지옥 갈게, 딸은 천국에 가.”

아기가 태어난 그 해였다. 2014년 봄 세월호에서 별 같은 아이들이 죽었다. 가장 아름다운 수백 개의 섬이 동시에 사라졌다. 칭얼대는 아기를 달래다가 우연히 만난 저 편지를 읽고 아기와 함께 울었다. 딸에게 보내는 엄마의 편지는 내 영혼이 가뭄의 논바닥처럼 마를 때마다 회상하는 성찰의 경구가 됐다.

구원을 고민하는 신학도 제자들은 신학수업에서 그 봄의 아픔에 관해 자주 토론했다. 한 제자는 말을 잇지 못하고 흐느끼다 눈물을 참을 수 없어 문 밖으로 조용히 나간다. 밖에서 한참을 머물다 눈물을 닦고 다시 들어온다. 다른 제자는 발제를 다 하지 못하고 눈물로 마무리를 한다. 딸과 함께 나눈 시간들을 회상하는 어미의 슬픔과 그리움이 너무 깊고 애절하다. ‘천국’은 누군가에게는 열망이자 구원의 표징이지만 엄마에게는 딸을 향한 미안함과 속죄의 현실이다. 딸에게 건네는 엄마의 이 세상 마지막 이별 의례는 딸을 저 하늘에 ‘올리고’ 자식을 위하여 정작 자신의 날개를 ‘접는다’. 이 모습에서 인간의 구원과 생명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다면, 우리는 어디에서 구원을 기대할 수 있을까.

올해 여름 무더위는 모두에게 위력적이었다. 그 열기가 만든 아지랑이에 대지가 흔들리듯, 교회도 흔들린다. 교회는 하늘과 땅이 만나는 곳,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위하여 모든 것을 준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있는 곳, 세상의 희망을 여는 곳이다. 그러나 오늘의 풍경은 교회가 세상을 향하여 희망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교회를 향하여 절망을 던지고 있는 것 같다.

아이가 돌에 미끄러져 넘어진다. 아이가 운다. 넘어진 아이를 바라보며 혼을 내거나, 돌에 바보 같이 넘어지지 않는 기술을 말하는 것이 옳은가? 아이는 무심한 사물이 아니다. 차라리 돌을 살아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아이의 눈에 걸맞게 돌에 군밤을 때려 주는 것. 그리고 아이와 함께 넘어지고 그 손을 잡아 함께 일어나는 것. 우리 시대는 이러한 사랑의 기술이 필요하지 않을까. 바로 교회는 이웃과 함께 넘어지며 함께 일어나는 곳이 아닐까.

혹시 오늘의 교회는 그 아이와 엄마의 아픔과 함께 하기보다는 오히려 누구도 잘 공감하기 어려운 낯선 동어반복만 가득 찬 장소는 아닌지. 사랑과 정의의 사건이 아닌 전파를 잃은 라디오에서 발신하는 의미 없는 잡음들. 인간의 고통과 아픔이 차고도 넘치는 이 시대에 정작 교회는 어디에 있을까. 하여 오늘 한국 사회는 “무엇이 교회이며 무엇이 종교인가”를 묻는다. 사랑하지 않는 삶은 법적으로는 무죄이더라도 신앙적으로는 유죄이다. 우리의 죄는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 우리의 여름에는 사랑이 없었다. 심지어 이제 사회가 유죄의 돌을 던져도 우리는 눈을 감는다.

“너는 돌 때 실을 잡았는데.” 열 달을 품고 잉태한 아이를 하늘로 보내는 엄마의 애절한 마음을 떠올린다. 엄마는 길쌈과 수고로 딸에게 모든 것을 다 주었지만 더 주지 못하여 슬프고 안타깝다. 인간의 고통과 아픔이 차고도 넘치는 이 시대, ‘세상의 교회’는 어디에 있을까.

엔도 슈사쿠는 인간 삶의 슬픔과 비애를 매우 깊고 영롱하게 ‘깊은 강’에서 담아내었다. “인간이 이토록 슬픈데 주여, 바다가 너무도 푸르릅니다. -침묵의 비(碑).” 우리 인생의 가장 뜨거웠던 계절이 지나간다. 그간 우리의 많은 것들이 흔들렸다. 이제 교회가 흔들리는 파국을 넘어 저 엄마의 마음으로 아이들의 천국, 세상의 희망을 함께 그리자.

전철(한신대 교수·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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