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선도 <17> 궁핍한 살림에 아내는 결혼반지 팔아 끼니 챙겨

전농감리교회 성도들 삶은 비참… 기도원 찾아 성도들 치유할 능력 구해

[역경의 열매] 김선도 <17> 궁핍한 살림에 아내는 결혼반지 팔아 끼니 챙겨 기사의 사진
김선도 서울 광림교회 원로목사가 담임하던 전농감리교회에는 청계천 성도들이 많았다. 1960년대 비만 오면 범람하던 청계천 전경. 국민일보DB
1960년 4월 우리 부부는 홍현설 감리교신학대 학장님을 주례로 서울 아현감리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전농감리교회의 15평 남짓한 목사관에 신혼살림을 차렸다. 그때부터 아내의 고생이 시작됐다. 아내는 그 어려운 왜정 말엽에도 유치원에 다닐 정도로 귀하게 자랐다.

결혼 전부터 나는 감신대 2학년에 재학 중인 홍도와 광성고 1학년이던 국도와 같이 살고 있었다. 결혼식 축의금은 모두 동생들의 등록금으로 들어갔다. 성미는 보리쌀이 섞인 쌀 서 말이 고작이었다. 성인 네 사람이 매일 밥 먹고 도시락 2개를 싸기엔 턱 없이 모자랐다.

결국 아내는 결혼반지를 팔았다. 그리고 국수 큰 다발 2개를 사서 끼니때마다 국수를 삶았다. 그래도 궁할 때는 아내가 새벽기도를 마치고 시장에 나가 남들이 버린 배추 시래기를 주워 김치 겉절이를 만들었다. 쌀을 씻던 아내가 하수구에 떨어진 쌀 한 톨을 조심스레 줍는 모습을 볼 때는 가슴이 저렸다.

전농감리교회 성도들의 삶은 비참했다. 장마철만 되면 청계천 물이 넘쳐 성도들이 사는 천막까지 구정물이 들어왔다. 가난한 곳에 질병도 많다고 장티푸스와 홍역, 식중독 같은 질병도 많이 발생했다. 성도들에게 나는 목사인 동시에 의사였다. 몸이 아프면 의사보다 나를 먼저 찾았다. 아프다고 하면 자다가도 달려 나갔다. 어쩌다 돼지고기라도 들어오는 날이면 차마 먹을 수가 없어 성도들의 집부터 찾아갔다.

내가 느낀 성도들의 존재 열망은 생존이었다. 비가 들이치는 천막에서 배를 곯아 가며 오염과 질병의 재를 뒤집어쓸지라도 생존하고 싶다는 열망, 살아보고 싶다는 열망이 강력했다.

그런 성도들을 보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일주일에 한 번씩 꼭 기도원을 찾았다. “하나님 제게 능력을 주시옵소서. 성도들의 상한 마음과 질병을 치유할 수 있는 성령의 능력, 위로와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말씀을 주시옵소서.”

밤새도록 바위에 엎드려 금식하며 기도했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 삼각산기도원에 담요 한 장을 들고 올라갔을 때다. 내 안의 부정적인 불순물을 토해내듯 악착같이 부르짖었다. 신기하게 부르짖을수록 가슴이 시원해졌다.

‘아, 뭔가 막힌 것이 뻥 뚫리는 것 같다. 내 안 깊은 곳에 거하시는 성령께서 흘러나와 내가 생각하고 알 수 있는 감각의 세계로 다가오시는 것 같다.’

6개월 이상 부르짖자 변화가 일어났다. 설교가 달라진 것이다. 나도 알지 못하던 강한 확신이 설교에 묻어났다. 성도들은 울며 감격해 했다. 신유의 기적을 경험했다. 1957년 40명이던 성도는 6년 만에 150명으로 불어났다.

나는 의학을 치유 목회에 적용했다. 심방 가방에는 늘 성경과 주사기, 약, 각종 치료기구가 들어 있었다. “어질어질하지 않나. 잠은 잘 자고 있나. 혹시 소화가 안 되지 않나.”

지금은 의사들이 기계로 진단하지만 당시는 손으로 만지는 촉진, 두들기는 타진, 증상을 묻는 문진 등이 주를 이뤘다. 청진기로 직접 심장 박동을 듣고 만져주고 상담했다. 그렇게 심령을 만지는 목사, 의사의 심정으로 다가섰다.

아픈 성도 중에는 진맥 후 몇 가지 질문만으로도 치유가 일어나는 것을 봤다. 병이 낫고 안 낫고를 떠나 성도에 대한 관심, 몸과 마음의 어루만짐이 영혼의 문을 여는 열쇠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았다. 그렇게 빈민가 사역을 하던 1962년 뜻밖의 제안이 들어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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