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재열] ‘사장님’의 나라, 늪에 빠지다 기사의 사진
한국의 자영업 과잉은 잠재실업자 유인하는 거대 늪…
자기 노동력 착취로 생존할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됐다
대기업 노조 대신 자영업·소기업 중심 혁신 포용전략으로
고가 소비재 시장 창출한 이탈리아 사례 보라


음식점이든 시장이든, 요즘 어딜 가나 듣는 호칭은 ‘사장님’이다. 월급쟁이인 필자는 사장님 호칭이 어색하다. 그런데 따지고 보면 한국은 사장님의 나라다. 1949년 농지개혁을 통해 대다수 소작농은 자작농이 됐다. 50년대만 해도 공무원·교사·은행원 등 소위 월급쟁이는 소수에 불과했고 대부분은 작은 가게나 공방을 운영하는 자영업자 즉 사장님이었다. 경제활동인구를 제대로 파악하기 시작한 1963년 비임금근로자 비중은 68.5%에 달했다.

공장과 기업이 늘고 상용근로자도 늘어 다수가 됐지만, 여전히 한국의 자영업자 비중은 2016년 기준 21.2%로 OECD 33개 회원국 중 5위, G7 국가 평균의 2배다. 한국의 사업체는 480만개, GDP 규모가 비슷한 캐나다 사업체는 74만개다. 한국의 사장님 숫자가 캐나다의 7배나 된다.

고도성장기 한국은 상승 열망에 가득 찬 프티부르주아 사회였다. 월급쟁이가 되려면 대학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필요했지만, 진입장벽이 낮은 자영업에는 누구든 뛰어들 수 있었고, 능력 있는 월급쟁이에겐 상승 이동의 통로였다. 블루칼라는 고된 육체노동을 벗어나기 위해, 화이트칼라는 정년 없는 평생 일거리를 위해 창업했다. 젊은 종합상사 직원들은 경력 쌓고 목돈 모으면 독립해 오퍼상을 꾸렸다. 이렇게 시작한 개인사업체들이 이제는 한국의 대표적인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이 됐다.

그러나 자영업 내부는 불평등이 심한 이중구조다. 성공한 소수와 실패한 다수가 갈린다. 연금 없는 은퇴자들이 퇴직금을 털어 치킨집이나 호프집 등을 개업하지만, 국세청 자료에 따르면 지난 10년간 자영업체 생존율은 17.4%에 불과하다. 자영업자 570만명 중 200만명가량이 과잉이라는 연구결과도 있다. 자영업이 잠재실업자들을 끌어들이는 거대한 늪이 된 것이다. 덕분에 공식 실업률은 낮아졌다. 외환위기 이후 정부가 자영업 창업을 실업 대책으로 지원한 것은 대량실업의 충격을 흡수하고 위기를 넘기는 데는 큰 도움이 됐다. 그러나 자영업 부채 증가라는 풍선효과를 낳았다. 작년 말 자영업자 대출 총액은 549조원, 소득 대비 부채 비중이 189%, 빚이 소득의 두 배다. 혹시 있을 금리 인상이 한국 경제의 폭탄이 될까 걱정하는 이유다.

영세 자영업자들은 자기 인건비를 못 건져도 일을 놓지 못한다. 자기 노동력 착취로 생존하는 셈이다. 소득 파악, 세금이나 의료보험 부과가 분명치 않은 회색지대도 적지 않다. 그래서 고소득에도 불구하고 세금을 적게 내는 자영업자들은 때로 ‘유리 지갑’을 털리는 월급쟁이의 분노를 자아낸다. 사장님 나라 한국이 월급쟁이 나라의 복지·노동정책을 따라 하다 보면 엉뚱한 문제가 생기곤 한다. 강력한 노조 이해를 대변한 최저임금 인상이 가져온 후폭풍이 대표적이다. 거센 반발이 일자 정부는 자영업자 세무조사를 면제한다고 발표했다. 도대체 원칙 없는 임기응변이다.

진보 집권 20년을 공공연히 주장하는 문재인정부라면 자영업자 비중이 한국 못지않은 이탈리아 진보정당의 경험에서 배우길 권한다. 중앙정치에서 밀려났지만, 중부지역 지방정부에서 장기 집권한 이탈리아 공산당은 지지기반인 대기업 노조를 대변하는 대신 소기업과 자영업자를 육성하는 과감한 혁신적 포용전략을 썼다. 소기업 수를 늘리되 이들 간 네트워킹을 촉진해 ‘규모의 경제’와 ‘범위의 경제’를 다잡는 기업 생태계를 만든 것이다.

섬유·패션·가죽·유리공예·가구·장난감·도자기 등 전통산업을 클러스터로 엮고 돈을 풀되 길드와 협동조합의 전문성, 기술평가 능력을 존중해 신용대출 기준으로 삼았다. 개별 자영업자나 소기업이 하기 어려운 기술개발과 훈련, 해외시장 개척, IT 기반 공유 인프라에 정책자금을 집중했다. 그 결과,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메이드 인 이탈리아’의 고가 소비재 시장을 창출했다. 수출과 고용이 늘고 중산층도 두터워졌다. 그 유명한 ‘에밀리아 모델’을 만든 것이다.

소수의 초고수익 대기업에 의존해온 한국 경제, 다가올 인공지능 시대의 ‘고용 없는 미래’를 생각할 때 소기업 중심의 ‘고용주도 성장’ 패러다임을 만들 비전과 실행력이 절실하다. 예정된 실패의 길에 들어설 미래의 자영업자들을 구할 명확한 정책 대안을 가진 유능한 정부라면, 퇴직금을 펀드로 끌어들여 젊은 창업자들의 혁신자본으로 활용해 산업구조를 혁신하고 수익을 은퇴자와 공유케 할 상상력을 가진 정부라면, 20년 아니라 그 이상의 집권도 환영이다. 그러나 길 잃은 돈 풀기식 소득주도성장 논란을 보니 덜컥 겁이 난다. 사장님들이 늪에 빠진 것은 분명한데.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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