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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길] 청각장애 가진 소녀의 성장기

산책을 듣는 시간/정은 지음/사계절/180쪽/1만1000원

[책과 길] 청각장애 가진 소녀의 성장기 기사의 사진
“나는 소리를 못 듣는다는 게 뭔지 잘 모른다. 늘 그래왔으니까. 내 모어(母語)는 수화다. …내 귀가 안 들리는 이유를 물으면 엄마는 언제나 고래처럼 귀지가 많아서라고 했다. 고래는 평생 귓속에 귀지를 쌓아 둔다고 한다.”

청각장애를 가진 소녀의 성장기를 그린 소설 ‘산책을 듣는 시간’은 이렇게 시작된다. 소녀의 이름은 수지(手知)다. ‘손이 안다’는 뜻이다. 수지는 어릴 때 고열로 청력을 잃었다. 수지는 엄마와 둘만의 수화(手話)를 만들어 소통한다. 수지는 소리가 들리지 않아도 ‘구름이 흘러가며 내는 소리, 물결이 번져 나가는 소리’ 등을 머릿속에서 만들어 낼 수 있다. 친구가 없어도 집에서 혼자 ‘노래 지도’ 만들기를 하며 노는 아이다.

수지네 가족은 하숙집을 운영한다. 할머니, 엄마, 고모 그리고 하숙생들까지 대식구가 산다. 하숙생의 도움으로 수지는 한글을 배우고 입 모양을 보며 대화하는 구화(口話)도 배운다. 장애인 특수학교에 들어갔지만 청각 장애인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한다. 그러다 중학교 때 시각장애인 친구 한민을 만난다.

한민은 색깔을 구분하지 못할 뿐 사물을 다 볼 수 있지만 언제나 안내견 마르첼로와 함께 다닌다. 수지는 마르첼로를 사이에 두고 한민과 산책하며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수지가 소리를 못 듣는 것에 불편을 못 느끼듯 한민도 색을 못 보는 것에 전혀 불편을 느끼지 않는다. 수지가 고3이 되자 가족들은 인공와우 수술을 권한다.

할머니는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을 때 그가 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면 네 귀로 들을 수 있지 않겠니”라며 수지를 설득한다. 수술 후 수지는 바깥에서 나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지만 자기 안의 고요한 세계가 파괴된 것에 분노한다. 수지는 한민과 밴드를 결성하고 노래를 창작하면서 작은 위로를 받는다. 그런데 곧 할머니가 돌아가신다. 할머니는 수지에게 “수지야, 네가 무슨 일을 하든지 먼저 너 자신과 좋은 친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을 남긴다.

‘산책을 듣는 시간’은 들리지 않거나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해하고 세상과 소통하는 고유한 방법을 아름답게 담아내고 있다. 이 작품으로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으며 등단한 정은 작가는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기꺼이 다가가면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던 일들이 마법처럼 일어난다. 나는 그 마법을 믿는다”고 말했다.

강주화 기자 rula@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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