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주의 작은 천국] 교회는 칼국수다, 이야기가 있는…

[김선주의 작은 천국] 교회는 칼국수다, 이야기가 있는… 기사의 사진
비 오는 날 대전의 한 손칼국숫집 열린 주방의 모습. 이 집은 칼국수가 아니라 이야기를 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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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날 연상되는 음식들이 있다. 뇌과학의 언어를 빌려 말하자면 음식에 대한 이해와 욕구는 뇌세포의 작용에 의한 것이다. 과거 어느 한때의 경험이 신경세포에 일정한 값의 데이터로 저장되었다가 그것과 연관된 사건이 일어나면 그 경험을 재현하고픈 욕구가 작동하는 것이다. 우리가 먹고 싶어 하는 모든 음식에 대한 욕구는 뉴런의 시냅스 작용에 의한 것이다.

비 오는 날의 칼국수에는 노동의 긴장과 피로, 그리고 나른한 휴식의 정감이 내재돼 있다. 예기치 않은 여름비는 과도한 노동의 행진을 멈추게 한다. 노동의 피로감이 갈수록 축적되어 그 무게가 삶을 짓눌러 멈추지 않으면 안 될 때, 그때 비가 내린다. 그때 농사꾼은 손을 놓고 비가 그칠 때까지 집 안에 들어앉아 긴장된 몸과 마음을 푼다. 폭주 기관차 같은 삶의 무게와 속도를 멈출 수 있도록 하늘이 명분을 제공하는 것이다. 전화 한 통으로 모든 음식을 배달해 먹는 요즘처럼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없던 시대에 밀가루 반죽으로 만들어 먹는 음식은 특별 간식이었다.

그런데 이 특별한 간식을 만들 때 온 집안의 여자들이 다 모여든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시누이가 반죽을 이기고 홍두깨로 밀어 얄팍해진 반죽 판 위에 밀가루를 발라 눌러 붙지 않게 한다. 그리고 그것을 팔뚝 굵기로 납작하게 말아 부엌칼로 뚝뚝 썰어낸다. 꼬마둥이를 시켜 텃밭에 있는 호박을 따오게 하면 낙숫물이 떨어지는 처마를 박차고 나간 아이는 아버지 알통만 한 호박 두어 개를 품에 안고 온다. 시누이는 부엌 흙바닥에 퍼질러 앉아 새초롬한 낯으로 감자를 긁는다. 할머니는 가마솥의 끓는 물에 조선간장으로 간을 맞추고 칼국수를 풀어 넣어 휘휘 젓는다. 감자 몇 개와 푸르뎅뎅한 호박 두어 개 쑥딱쑥딱 썰어 넣고 한소끔 끓여내면 밀가루 냄새가 허옇게 머리를 풀고 안개가 되어 올라온다.

안개 속으로 무쇠칼등 같은 남자들이 초청되어 온다. 우산 속에 고무신을 끌고 집 앞을 지나가는 동네 남정네도 두어 명 붙들려 온다. 탱탱한 면발이 콧등을 때리며 후루룩 입술을 훑고 지나갈 때 빗방울이 함석지붕을 또르르 미끄러져 내려온다.

구름을 차고 내려온 수많은 물방울이 지상에 낙하하여 하나의 자리로 흘러들어가듯 할머니와 아버지 어머니와 고모, 시누이와 시어머니, 어린아이와 겨드랑이 냄새 풍기는 남정네와 담배 냄새 짙은 노인네, 마루 밑의 강아지와 마당가의 꽁지 빠진 수탉, 검게 그을린 아궁이와 빗방울을 밀어내는 토란잎들이 밀가루 반죽에 이겨지고 칼국수로 다시 태어난다.

칼국수에는 무딘 칼로 베어낸 생살 같은 삶의 아픔과 풍경이 있다. 아니, 칼국수에는 노동의 고단함과 나른한 휴식, 눅눅한 공기 속에 사람과 사람이 밀가루 반죽처럼 이겨지고 다시 태어나는 풍경이 압축파일로 저장되어 있다. 이 압축파일은 비 오는 날 자동으로 풀리도록 설계돼 있다.

파일이 풀리면 우리는 하나의 이야기를 만난다. 그 이야기에 내가 들어 있다. 밀가루를 이기고 홍두깨로 반죽을 밀고 칼질을 하고 감자를 깎는 여인네들, 그들의 도란거리는 정담과 체온들, 빗속을 뚫고 호박을 따오는 ‘나’가 있다. ‘나’는 하나의 이야기로서만 존재한다. 아브라함도 모세도 다윗도 예수님도 바울도 모두 이야기다. 어린 시절 교회에 가면 이 이야기들을 만날 수 있었다. 성경은 이야기이고 이야기는 칼국수다.

성경은 삶의 이야기이며 존재에 대한 성찰이다. 존재와 삶의 밑바닥에서 올라온 신앙고백이다. 교회는 문자로 된 신앙고백의 압축파일을 푸는 곳이다. 그래서 성경을 읽으면 이야기가 보이고 그 이야기 속에 내 삶이 내재돼 있는 것을 깨닫는다. 이야기가 사라지고 구원과 축복의 이미지만 남은 교회, 그 교회는 소비되는 하나의 상품에 불과하다.

<대전 길위의교회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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