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남혁상] 매케인 레거시 기사의 사진
2008년 미국의 제44대 대통령을 선출하는 대선을 얼마 남기지 않았을 때 얘기다.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인근의 한 고교에서 공화당 대선후보 존 매케인은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을 했다. 연설 도중 열렬한 지지자인 한 여성이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 여성은 민주당 대선후보였던 버락 오바마를 거론했다. “오바마는 믿을 수 없어요. 아랍 사람이잖아요.” 오바마의 중간이름 ‘후세인’ 탓에 오바마를 둘러싸고 ‘테러리스트’ ‘무슬림’ 등 음모론이 한창 제기될 때였다. 매케인은 이렇게 답변했다. “그렇지 않아요. 그는 품위 있는 사람입니다. 가정적인 미국 시민이기도 하죠. 전 그와 근본적인 정책 사안들에 대해 다른 견해를 가졌을 뿐입니다. 그것이 선거운동의 모든 것입니다.”

미국 언론은 매케인이 이렇게 말하는 장면을 정치적으로 반드시 기억해야 할 순간으로 꼽는다. 대선을 코앞에 둔 절체절명의 시기, 오바마를 겨냥한 네거티브 공세가 정점을 찍을 때, 지지율에서 밀리는 공화당 대선후보가 많은 지지자 앞에서 진정성 있게 한 발언이라기엔 뜻밖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얼마 뒤 그의 대선 패배 연설도 그 연장선에 있다. 출구조사 결과 오바마의 승리가 확실해지자 매케인은 정치적 고향인 애리조나주의 한 호텔에 모인 지지자들 앞에서 연설했다. “이번 선거는 역사적인 선거입니다. 오바마는 스스로를 위해서도, 나라를 위해서도 위대한 일을 해냈습니다. 그는 주목받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미국은 기회가 열려 있는 나라라는 희망을 줬습니다. 저는 그가 어려움을 헤치고 우리를 이끌 수 있도록 그를 도울 것을 약속합니다.” 매케인을 이해하지 못했던 일부 지지자가 야유하자 그는 “이번 실패는 나의 것이고, 여러분 것이 아니다”며 오히려 그들을 위로했다.

정치인 매케인은 36년간 소신과 원칙, 신념에 따라 행동했다. 그 원칙의 잣대는 ‘나라와 국민에게 이익이 되느냐’ 하나였다. 대표적인 장면이 지난해 7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1호 공약인 ‘오바마 케어 폐지’ 법안이 상원에 상정됐을 때다. 뇌종양 수술로 거동이 힘들었던 그는 늦은 밤 불편한 걸음으로 회의실에 들어선 뒤 치켜세웠던 엄지손가락을 떨어뜨리며 “노”라고 말했다. 공화당이 사실상 당론으로 채택했던 오바마 케어 폐지 법안이 찬성 49표, 반대 51표로 부결되는 순간이었다. 그는 원래 오바마 케어 반대론자였다. 하지만 폐지 법안보다는 오바마 케어가 국민에게 더 많은 의료 혜택이 돌아간다는 이유로 폐지 법안에 반대했다.

2001년 공화당의 감세안 반대, 2002년 민주당 정치자금 규제 법안 찬성 등으로 당내 강경파 티파티의 불신을 받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그가 정치권, 나아가 미국 국민의 존경을 받은 계기가 됐다.

물론 매케인이 항상 올바른 정치인은 아니었다. 1980년대엔 정치자금 스캔들에 휘말렸고, 2000년 대선후보 경선에선 백인우월주의의 상징 같은 남부연합기 철거 주장을 주워담기도 했다. 정계에서 활동할 때 이단아, 고집불통으로도 불렸지만 그의 사후 미 정계와 언론, 세계 각국 지도자들이 보내는 헌사는 찬양 일색이다. 자칫 과하게 보일 정도다. 신념과 소신, 원칙과 옳음의 기준에 따라 행동했던 정치인이자 애국자, 위대한 리더, 개인보다 공공의 이익을 우선시했던 용기 등 ‘매케인 레거시(legacy)’를 향한 추모와 애도인 듯하다. 이런 분위기는 며칠 후 오바마가 조사를 맡는 장례식과 해군사관학교에 안장되기까지 가라앉지 않을 것 같다.

2018년 대한민국의 보수 정치는 어떤가. 좌우 이념의 가치를 뛰어넘는 정치인 또는 정치상(象)은 한국 보수 정치에서 사라진 지 오래된 듯하다. 이미 궤멸 수준으로까지 간 마당에 그런 것을 찾는 것은 사치일 수도 있겠다. 거창하게 레거시까지 기대하지는 않는다. 최소한 방향을 잡고 나아갈 길을 제시하는 길잡이라도 나와줬으면 한다. 국민은 그런 보수 정치인에게는 아낌없이 박수를 쳐줄 준비가 돼 있다.

남혁상 국제부장 hsnam@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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