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승림의 인사이드 아웃] 클래식에 깊이 새겨진 거장의 휴머니즘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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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탄생 100주년을 맞이한 레너드 번스타인(1918∼1990)처럼 예술과 정치, 인종, 종교에 이르기까지 전방위적으로 아웃사이더의 삶을 표방한 인물도 드물다. 다재다능했던 그를 20세기의 르네상스인으로 첫손에 꼽는 데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지휘자로서 말러의 교향곡 전곡을 세계 최초로 녹음한 그는 20세기 중반 전 지구를 휘어잡은 ‘말러 광풍’의 발원지였다. 작곡가로서는 가장 복잡한 현대음악의 어법을 완벽하게 통달한 가운데에도 대중적인 록, 재즈, 라틴 음악 등을 도입하며 현대 클래식 작곡계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뿐만 아니라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 등 뮤지컬까지 작곡해 미국 브로드웨이에 진출했던 최초의 정통 클래식 작곡가이기도 하다. 폐쇄적인 엘리트 문화 속에서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라던 클래식 음악을 대중에게 소개하는 데도 앞장섰다. CBS를 통해 미국 전역으로 방송된 ‘번스타인의 청소년 음악회 시리즈’는 클래식 음악계의 장벽을 넘어 일반 서민 계층에게까지 번스타인을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매력적인 외모에 유창한 언변, 그리고 ‘레니 댄스’라 불릴 만큼 현란한 포디엄(podium) 위에서의 지휘 동작으로 좌중을 사로잡았다. 불혹을 막 넘긴 나이에 그는 순수 예술과 대중 예술 양쪽 모두를 아우르는 정상에 올라 있었다.

하지만 그가 처음부터 모든 계층의 사람들에게 환영받는 매력적인 존재였다고 생각한다면 큰 착각이다. 그의 정체성은 오히려 소외된 소수에서 출발했다. 그는 보수적인 유대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랍비로 키우고 싶었던 아들이 음악가가 되려는 결심을 했을 때 흔쾌히 허락할 수 없었다. 엘리트의 집합소인 하버드대에 입학했을 때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차별을 받았다. 그의 졸업 논문 ‘미국 음악에 통합된 인종적 요소’는 이런 자신의 경험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1943년 불과 25세의 나이로 브루노 발터를 대신해 뉴욕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실력을 인정받은 그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유럽 진출을 모색했다. 하지만 보수적인 유럽 오케스트라와 음악계는 클래식의 변방인 미국에서 찾아온 루키를 진지하게 대우하지 않았다. 사실 그가 처음 주목받은 이유도 유럽에서 망명한 지휘자들이 장악하고 있던 미국 음악계에서 자국이 배출한 혜성 같은 존재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매카시즘 광풍이 불면서 위기에 처했다. 공공연히 진보적인 정치색을 드러냈던 그는 ‘공산주의자’로 낙인찍혔고 FBI(미 연방수사국)의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방송 출연 금지 명단에 포함되면서 미국 내에서 지휘 기회도 박탈당했을 뿐 아니라 유럽 연주 여행을 위해 필요한 여권 갱신마저 거부됐다.

‘나는 보수주의자’라는 진술서에 서명한 뒤에야 활동을 재개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계급을 초월한 보편적 예술관과 휴머니즘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흑인 인권운동의 기폭제가 된 ‘셀마-몽고메리 대행진’에 참가하며 공개적으로 마틴 루서 킹 목사를 지지했으며, 베트남 전쟁 반대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미국을 대표하는 지휘자의 경계를 넘어선 호소는 인권, 평등, 평화와 같은 보편적 가치를 미국 문화로 수용하는 데 보탬이 되었고, 빈부와 이념을 초월한 그의 사상은 결국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을 수 있었다.

그의 거침없는 행보는 한국 정부도 당황시킨 바 있다. 79년 뉴욕 필을 이끌고 찾아온 번스타인의 첫 내한 프로그램에는 당시 공산국가 작곡가라는 이유로 금지곡에 올라있던 러시아의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5번이 포함돼 있었다. 박정희정부는 번스타인을 직접 찾아가 프로그램을 바꿔줄 것을 요구했지만 번스타인은 연주를 강행했다.

민주주의의 요람으로 여기던 미국 최고의 지휘자와 악단이 연주한 쇼스타코비치를 한국 청중과 정부 요인들은 어떤 심정으로 감상했을까. 이 연주는 물론 쇼스타코비치 교향곡 한국 초연으로 기록에 남아 있다.

노승림 <음악 칼럼니스트·문화정책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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