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티 테이블] 눈물과 웃음의 자리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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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울어야 눈물도 꽃이 됩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를 위해 울 때/ 너무 오래 울지 말고 적당히 울 때…죄를 뉘우치는 겸손으로 착하게 울 때/ 눈물은 진주를 닮은 하나의 꽃이 됩니다/ 세상을 적시며 흐르는 강물 꽃 눈물 꽃이 됩니다”(이해인의 시 ‘눈물 꽃’)

인간이 흘리는 모든 눈물이 똑같은 것처럼 보인다. 실제로는 언제 어떻게 흘리느냐에 따라 눈물의 구성 성분이 다르다. 눈물을 발생시키는 뇌의 지점도 다르다. 이해인 시인이 노래한 ‘눈물’은 딱딱하게 굳어진 인간의 죄성을 녹이는 ‘참회의 눈물’을 의미한다. 눈물의 화학적 구성을 오랫동안 연구해온 미국 생화학자 빌 프레이는 눈물을 생물학적 기준에서 ‘지속적인 눈물’ ‘자극에 의한 눈물’ ‘감정적 눈물’로 나눴다. ‘지속적인 눈물’이란 흘러내리는 눈물이 아닌, 눈동자 표면을 촉촉하게 해주는 윤활유와 같은 것이다. ‘자극에 의한 눈물’은 눈이 손상될 위험이 있을 때만 작용한다. ‘감정적 눈물’은 강력한 감정이 불러오는 눈물이다. 이 눈물은 마음의 메시지를 담고 있으며 심리치료에도 영향을 준다.

직장인 A씨(32)는 고교 시절 친구들의 괴롭힘에 힘들었다. 가정폭력을 견디다 못한 엄마는 우울증으로 목숨을 끊었다. 칠흑같은 청소년기를 보낸 그는 직장생활도 결혼생활도 순탄치 않았다. 한 집단상담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하며 “전 힘들지 않았어요”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눈물을 흘려야 할 대목에서 헛헛하게 웃었다. 집단상담을 인도하던 상담자는 그에게 “힘들다고 얘기해도 괜찮아요”라고 했다. 동석한 5∼6명에게 공감 어린 위로를 듣던 그는 그제야 “정말로 힘들었어요”라고 말했고 결국 엉엉 울기 시작했다. 눈물이 슬픔의 해독제가 될 수 있었다.

그가 감정을 숨겼던 것은 불안감 때문이었다. 우린 누군가의 공감을 받을 때 불안감을 밀어낼 수 있다. 충분히 안전하다고 여길 때 비로소 울 수 있다. 슬픔이 공감을 만나는 순간 행복으로 전환될 수 있다.

공감이란 자신의 경험으로 해법을 설명하거나 논리적으로 판단하지 않고 상대의 아픈 감정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감정의 엘리베이터를 타고 함께 내담자의 마음 밑바닥으로 내려가세요. 그리고 그 순간에 함께 머무세요.” 상담학 교수들이 강조하는 말이다. 상대의 감정을 함께 느끼는 공감은 인간과 인간의 관계를 더욱 가깝게 해준다. 슬픔이란 감정이 밖으로 드러나 누군가와 공유되면 연대감과 행복감이 생긴다. 그 대상이 사랑하는 사람이면 기쁨은 배가 된다.

성경 창세기 17∼18장에 100세 아브라함과 90세 사라가 “아들을 낳을 것”이란 천사의 고지를 듣고 웃었다는 기록이 나온다. 이 웃음에 대해 미국 작가이자 목사 프레드릭 비크너는 ‘진리를 말하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웃음은 눈물이 나오는 곳만큼 깊은 곳에서 나온다. 어떤 면에서 이 웃음은 눈물과 똑같은 곳에서 나온다. 눈물이 그렇듯 웃음도 세상의 어둠에서, 길 잃은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몹시 그리워하는 그 세상에서 온다. 다만 웃음은 어둠의 적으로, 어둠의 한 증상으로서가 아니라 어둠의 해독제로 온다는 점만 다르다.”

이 웃음은 자식 없이 지내온 긴 세월의 회한, 큰 민족의 아버지가 될 거라는 하나님의 약속이 지켜지리란 안도감, 어쩌면 아들을 낳을지도 모른다는 믿음 등으로 불안하고 복잡한 감정이 표출된 게 아닐까. 만일 천사가 “주님 약속을 기다리며 얼마나 힘들었소. 하나님은 항상 기억하고 계셨다오”라고 말했다면 부부는 감정을 억누르지 않고 눈물을 보이지 않았을까.

남에게 털어놓기 어렵거나 공감해줄 동료가 없는 사람은 어떡해야 할까. 상담가들은 상처받았던 ‘그때 그 순간 자신의 모습’을 기억하고 이렇게 말하라고 한다. “넌 분명한 이유가 있어 이 세상에 온 존재야. 내가 안아줄게. 더 이상 혼자 두지 않을게.” ‘그 아이’가 느꼈을 무거운 감정을 더 이상 숨겨둘 필요가 없을 때 비로소 그 기억은 변연계의 기억장소인 해마에 다시 꺼내도 괜찮은 기억으로 편입된다.

눈물 꽃과 웃음꽃이 피는 토양은 다르지 않다. 웃음과 눈물의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이든 결국 내 삶의 토양에서 피어나는 것이다. 내 안의 유배된 기억을 그대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부모에게 버려진 느낌, 한 명도 아는 척해주지 않는 학교생활, 무기력했던 모습도 모두 나의 일부이고, 이를 받아들이는 일이 내가 다시 버림받거나 비난받을 일이 아니란 사실을 아는 것이 치유의 완성이다. 시인의 노래처럼 눈물은 진주를 닮은 꽃이 되고, 세상을 적시며 흐르는 강물 꽃이 될 것이다.

종교2부 선임기자 jeeh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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