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대의 ‘혁명적 낭만주의’ 선언문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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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신분은 대중음악이되 대중음악의 경계를 훌쩍 넘어 존재하는 노래 한 곡이 있다. 대중음악은 유행과 시장, 그리고 매스미디어의 기반 위에서 존립한다. 노래에 주어진 시간은 짧다. 거의 모든 사람에게 동시에 알려진 노래라도 시간의 풍파를 건너 오랫동안 대중의 뇌리에 살아남는 노래는 극히 드물다. 그러나 시장에서 주목받지 못했고, 미디어의 지원은 기대할 수조차 없었으나 긴 시간에 걸쳐 명곡으로 자리 잡고, 나아가 한 시대와 한 세대를 대표하는 성가의 지위를 획득한 노래가 있으니, 다름 아닌 ‘아침이슬’이다.

청년의 송가가 탄생하기까지

1971년의 봄은 대한민국의 제7대 대통령 선거로 무척 뜨거웠다.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는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헌법을 유린했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길을 그대로 따랐고, 69년 3선 개헌을 날치기로 통과시킴으로써 다시 한 번 헌정을 더럽혔다.

박정희의 경쟁자는 ‘40대 기수론’을 펼친, 제1야당인 신민당의 유력 후보로 예상되던 김영삼을 극적으로 꺾고 후보가 된 김대중. 전남 신안 출신의 이 젊은 후보는 기업을 대상으로 했던 정치자금 근절과 부정부패 추방, 그리고 특권 부유층의 세금 인상과 서민의 세금 감면, 향토 예비군과 학생 교련 폐지, 통일원 격상과 지방자치제 부활 같은 민주적인 공약을 내걸며 신선한 바람을 몰고 왔다. 그의 부산 유세에 16만명, 서울 장충단 유세엔 30만명이 운집했다. 박정희의 3선을 저지하는 듯한 분위기를 전국적으로 만들었다.

하지만 결과는 94만여 표차로 박정희가 승리했다. 신민당은 전국적으로 조직된 선거 부정으로 100만표 이상을 도둑맞았다고 주장했다. 실제로 서울의 김대중 주거지인 동교동 선거구부터 시골 곳곳에까지 관권을 동원한 부정 투표가 자행됐다. 가령 김영삼의 측근인 최형우는 울산 울주군이 고향이자 자신의 지역구인데, 자신의 친인척만 500명이 넘는 그 동네에서 어떻게 5표만 나올 수 있냐고 분통을 터트렸다. 그의 인터뷰는 석간 초판에 실렸으나 재판부터는 삭제돼 지면에서 사라졌다.

특히 김대중은 유세 내내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를 무너뜨리지 못하면 대한민국은 총통제 국가로 전락하게 된다고 경고했는데, 10월 유신으로 그의 불길한 예언은 그대로 실현된다. 게다가 이 선거는 대한민국의 선거 문화에 지역감정이라는 악성 바이러스를 유포한 최악의 선거였다. 후보자에 대한 색깔 공세도 모자라 선거를 지역 간의 감정 대립으로 몰고 간 것이다. 전남에서 김대중은 박정희보다 2배의 표를 얻었지만 경북에서 박정희는 김대중보다 3배의 표를 더 얻었다. 경북에서의 표 차이가 전국의 표 차이와 거의 같았다.

70년대의 개막과 함께 대학 캠퍼스를 거점으로 일기 시작한 청년문화는 3선 개헌 반대와 교련 반대라는 일련의 투쟁을 통해 민주화와 정권 교체를 강력히 희망했지만 온갖 비리로 얼룩진 선거는 미래를 향한 이들의 꿈을 간단히 짓밟았다.

선거가 끝난 다음 달, ‘킹박’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박성배의 유니버샬 레코드사는 한 명의 여성 신인 가수 음반을 발매한다. 이제 갓 대학 새내기가 된 이 생머리 소녀의 데뷔 앨범은 그다지 큰 반향을 불러오지 못한 채 사라지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 앨범의 첫머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노래 하나가 대학가에 요원의 불길처럼 조용히 번져 나가 마침내 70년대와 80년대 한국 청년의 송가가 될 줄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양희은과 김민기가 만든 청년문화의 신화

양희은은 이렇게 한국 대중음악사에 등장한다. 그리고 이 노래를 만든 김민기는 70년대 한국 청년문화의 얼굴 없는 신화가 된다.

이 두 남녀 대학생의 만남은 두 장의 위대한 앨범과 오욕으로 얼룩진 한 장의 앨범을 낳는다. 이봉조와 현미, 길옥윤과 패티김, 신중현과 김추자 조합과는 또 다른 영토에서 이들은 한국 대중음악사에 지성과 패기의 새로운 감수성을 수놓았다.

서울대 미대생이었던 김민기는 한국전쟁 때 인민군의 학살로 아버지를 잃고 유복자로 태어났다. 김민기는 경기고를 다니던 60년대, 밥 딜런을 위시한 서구 청년문화의 세례를 받으며 성장했고 토속적이며 풍자적인 시인 김지하의 민족 미학에 큰 영향을 받았다. 그는 고등학생 시절에 초기 명곡인 ‘친구’를 작곡했을 정도로 탁월한 아마추어 작곡가였다. 아울러 뛰어난 통기타 연주자였으며, 매력적인 베이스 바리톤의 목소리를 지닌 가수였다.

이 땅의 대중음악에서 청년문화의 주력 도구는 통기타와 하모니카였고, 이들 어쿠스틱 악기로 이뤄진 포크음악은 신세대를 대표하는 음악 문법이었다. 이 음악 언어는 당연히 60년대 서구 자유주의 청년문화에 대한 동경으로 시작됐다. 미국과 유럽의 청년문화의 주력인 로큰롤이 한국 청년문화의 마이너 장르가 되고, 서구의 조연인 통기타 음악이 한국 청년문화의 주연이 되는 현상은 참으로 흥미롭다.

로큰롤이 낙오자 청년들의 본능적인 저항이라면 포크는 엘리트 청년들에 의한 비판적인 지성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일렉트릭 사운드가 전제인 로큰롤은 물질적 풍요와 그 풍요 속의 어두운 소외를 전제로 한다. 가난에서 안간힘을 다해 상승하려는 60년대 한국 자본주의의 수준은 로큰롤을 일상적인 하위문화로 둘 만큼 생산력이 높지 않았다. 따라서 60년대 중·후반에서 70년대 전반까지 한국 로큰롤의 세력은 결코 만만치 않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미8군 무대 혹은 나이트클럽 같은 유흥문화 공간에서나 존속 가능한 것이었다.

게다가 로큰롤의 에너지를 못마땅하게 여긴 박정희정부는 로큰롤을 퇴폐와 문란의 문화적 적대자로 규정했다. 음향적으로, 그리고 차분한 무대 매너의 차원에서도 포크는 훨씬 온건했다. 적어도 송창식과 윤형주가 짝을 이룬 트윈 폴리오나 이필원과 박인희가 혼성 듀오를 이룬 뚜아에무아가 통기타 반주로 아름다운 하모니를 들려줄 때까지는 말이다.

3선 개헌을 강행하며 헌법을 휴지 조각으로 만들면서부터 박정희 정권은 독재를 향한 액셀러레이터를 밟았고, 한국의 재야와 청년 지식인들은 더욱 비판의 목소리를 높여갔다. 김민기와 그의 세대는 해방 이후 출생한 1세대로, 이들에겐 황민화 교육을 받아야 했던 어두운 기억도 없었고 초등학교 시절 4·19를 목도하며 민주주의를 익혔으며, 10대 시절 한·일 회담 반대 투쟁을 겪으며 민족주의의 시각을 강화한 특별한 세대였다. 이들은 미국의 문화를 동경하면서도 민족문화에 대한 갈망을 동시에 지닌 처음이자 마지막 세대였다. 우리말 바로쓰기 운동이나 탈춤 부흥운동, 민요 보급운동 같은 문화운동이 이들에 의해 탄생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닌 것이다.

김민기는 바로 이 세대의 토착적 산물이었다. 그리고 ‘아침이슬’은 김지하의 ‘오적’과 함께 이 혁명적 낭만주의 세대의 문화적 선언문이 되었다. 찬송가의 화성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노래 제목만큼이나 지극히 순수하고 전원적인 첫 번째 주제의 반복으로 전반부가 구성된다. 그러나 ‘태양은 묘지 위에 붉게 타오르고’로 시작하는 두 번째 테마에 이르면 주체와 세계 간의 해결의 전망이 보이지 않는 번민과 갈등으로 전진한다.

이 두 번째 주제가 극점에 도달하는 순간, 노래는 예상치 못한 비장한 장엄함으로 극적으로 비상하며 ‘나 이제 가노라’라는 세 번째 테마를 선보인다. 그리고 다시 첫 번째의 순수한 자연의 내면으로 영원히 귀환하지 못한다.

‘아침이슬’ 세대의 탄생

이 노래는 당시의 주류 음악언어인 트로트와 스탠더드팝 스타일의 한국 대중음악과 근본적으로 결이 달랐다. 애초부터 시장의 성공과는 거리가 먼, 너무도 무겁고 어두운 자기 고백에 가까웠다. 이 노래에 미학적 반전을 제공하는 것은 서강대 사학과 새내기 여대생의 당당하고 싱싱하기 이를 데 없는 놀라운 가창이었다.

애상과 영탄으로 아롱지는 밤의 유흥의 습기를 원천적으로 제거한, 기교를 거부한 또렷하고 단호한 발성은 전통적인 여성 가수의 관습을 단숨에 무너뜨렸다. 바로 이러한 양희은의 목소리가 이 노래의 음표와 노랫말에 역사적이고 사회적인 생명력을 부여하는 데 성공한다.

많은 이들은 이 노래가 운동권의 투쟁가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 노래는 혁명가가 아니라 한낱 대중음악이었을 뿐이다. 그러나 통기타 두 대 연주가 반주의 전부인 이 단출한 노래는 서구와 전통 사이, 식민지와 독립 사이, 출세의 욕망과 민주주의에 대한 헌신 사이에 고뇌하고 갈등하던 한국 청년 지식인의 내면을 관통했다. 유신이 선포되면서 이 곡은 유신 반대 시위에 참가하는 이들에게 장렬한 공감을 자아내는 단 하나의 곡이 됐다. 70년대 이후 한국 민주주의의 역사는 이 노래를 제외하고는 기술할 수 없다. 나중에 민주화 세대라고 불리게 되는 70년대와 80년대의 청년문화 세대는 바로 ‘아침이슬’ 세대라고 할 수 있다.

김민기와 양희은은 72년 보다 성숙한 완성도를 지닌 양희은의 두 번째 앨범에서 다시 만나 한국 포크음악사를 빛내는 걸작을 합작했다. ‘작은 연못’ ‘새벽길’ ‘백구’ ‘서울로 가는 길’ 등 주옥같은 수작이 음반의 앞면과 뒷면을 가득 채웠다. 하지만 김민기는 당국의 요시찰 인물이 되었고 모든 활동을 규제 당한다. 둘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좋았다. 그러나 78년 양희은은 김민기의 동의도 없이 김민기의 텍스트를 함부로 훼손해 ‘반공’의 앨범으로 탈바꿈시키는 어이없는 실수를 범한다. 세 번째는 아니 만났으면 좋았을 것이다.

<강헌 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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