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톺아보기] 버려야 채워지는 역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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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압제는 1945년 8월 15일로 종지부를 찍었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도 잠시, 극심한 혼란이 시작됐다. 한마음으로 해방을 기다렸을 이들은 잘린 허리의 양측에 서서 서로에게 총을 겨눴다.

1950년 6월 25일 이전에도 38선 근처에선 충돌이 빈번했다. 공산당의 박해를 피해 남쪽으로 떠나는 피난민들의 행렬도 끊이질 않았다. 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공산주의자들은 기독교인들을 적대시했다. 그들은 미국과 기독교를 동일시하면서 적대감을 키웠다.

적어도 북한에선 기독교인들이 설 자리가 없었다. 피난은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물론 핍박의 땅에 끝까지 남아 교회를 지킨 목회자들도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압제에 저항했던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불의에 저항하는 건 신앙의 또 다른 모습이었다.

공산주의에 맞섰던 목사들의 마지막은 죽음이었다. 최근 대한예수교장로회(예장) 통합 총회는 김상현(1882∼1948) 목사를 순교자로 추서했다. 그는 격변기, 이 땅의 아픔을 온몸으로 받아낸 목회자였다. 1919년엔 만세운동을 주도했다는 혐의로 2년 반 동안 복역했다. 그러면서도 북한 곳곳에 흩어져 있던 10여곳의 교회를 돌며 복음을 전했다. 악랄했던 공산주의자들은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다. 평북 용천 대성교회에서 목회하던 1948년, 폭도들은 교회를 습격하기까지 했다. 모든 기물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무자비한 폭력을 몸으로 받아내면서도 신앙을 지킨 김 목사는 후유증으로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자유를 찾아 몸을 피하지 않은 대가는 이처럼 참혹했다.

그가 순교한 지 70년이 지나 후배들이 그의 숭고했던 삶을 기억해 낸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역사는 수많은 민중의 피와 땀에 의해 변화하고 발전했다. 하지만 김 목사처럼 자신의 목숨을 초개와 같이 버린 한 생명의 희생은 더없이 값진 자양분이다. 한 사람의 삶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헌신과 사랑은 버림과 희생이 동반될 때 더욱 큰 빛을 발하는 게 아닐까. 다 틀어 쥔 채 사랑과 복음을 이야기하는 건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다. 사실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버리고 비운 이들의 삶은 그래서 아름답다.

신앙은 쉬지 않고 계승되어야 하는 진리다. 예장통합 총회가 김 목사를 순교자로 추서한 건 영원토록 기억하겠다는 다짐이기도 하다. 기억한다는 건 후대에 복음을 전하기 위한 출발점이다. 교회가 세속화됐다는 지적이 크다. 이런 비난을 극복하기 위해 우리가 돌아갈 자리가 어디인지 찾아야 한다. 신앙의 선배들이 걸었던 순교의 핏자국 근처 어디쯤에 신앙인들의 본향이 있지 않을까. 버려야 채울 수 있다는 역설을 실천하고 경험할 때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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