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꿈틀대는 종전선언, 성과 절실한 북, 핵 리스트 받아내려는 미 기사의 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2차 정상회담이 가시권에 들어오면서 문재인 대통령의 연내 종전선언 구상이 다시 동력을 얻고 있다. 북·미 간 비핵화 협상은 종전선언과 핵 신고를 맞바꾸는 문제에 막혀 진전이 없었는데, 양 정상이 다시 만나 담판을 짓겠다는 의지를 내비침에 따라 돌파구가 마련될지 주목된다.

종전선언해도 정전협정 유효

종전선언은 한반도에서 전쟁이 끝났다는 정치적 선언으로 법적 구속력은 없다. 국제법 전문가들은 종전선언을 해도 한반도를 규율하는 건 여전히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이라고 본다. 이기범 아산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14일 “역사적으로 평화협정을 체결하기 전에 따로 종전을 선언한 사례는 없다”며 “종전선언은 정치적 선언일 뿐 법적 체제를 변화시키는 것은 아니다”라고 말했다. 이어 “전쟁이 끝났다고 선언은 했는데 평화협정 체결 전까지는 정전협정이 유효한 어색한 상황이 펼쳐지는 것”이라고 말했다.

제1, 2차 세계대전과 이후 발생한 전쟁을 끝내는 평화조약(협정)들을 보면 전문 또는 1항에 전쟁상태의 종식을 선언하는 문구(the state of war will terminate)가 들어가 있다. 문재인정부는 이를 별도 절차로 끄집어내 평화협정 체결 전 과도기에 북한의 체제 안전을 보장하는 수단으로 삼아 비핵화 협상과 연계시킨 것이다. 종전선언은 4·27 판문점 선언에 연내 추진하는 것으로 명시돼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 3월 종전선언 추진 의사를 처음 드러냈다. 문 대통령은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 회의에서 “북·미 정상회담은 진전 상황에 따라 남·북·미 3국 정상회담으로 이어질 수 있다”고 했었다. 이에 따라 정부는 6·12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남·북·미 3자 종전선언을 구상했지만 미국의 반대로 무산됐다. 또 다른 계기로 꼽혔던 정전협정 체결 65주년(7월 27일)은 이미 지나갔고, 9월 유엔총회에서의 종전선언 가능성도 현재로선 희박하다. 단 다음 주 남북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과 핵 신고 문제가 잘 풀리면 한·미, 북·미 연쇄 정상회담을 통해 이를 구체화할 수 있다는 관측이 나온다.

북이 ‘정치적 선언’에 매달리는 이유

북한 입장에서 종전선언은 그 자체로 북·미 관계 개선을 상징하는 성과다. 핵·경제 병진 노선을 버리고 사회주의 경제발전 총력 노선을 채택한 이상 전쟁 걱정 없이 경제 활동에 매진할 수 있는 여건 조성이 뒤따라야 한다.

김동엽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핵을 가졌기 때문에 미국과의 담판이 가능했고, 이제 인민들이 잘 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자발적으로 핵을 내려놓는다는 것이 김 위원장의 논리 구조”라며 “김 위원장으로선 비핵화를 약속했는데 한·미 연합 군사훈련이 유예된 것 말고는 안보 불안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보장이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교수는 “북한은 비록 문서 한 장이라고 해도 종전선언을 받아냈다는 가시적인 성과가 절실하다”고 했다. 종전선언은 비핵화와 체제 안전 보장을 동시에 주고받는 협상 틀을 만드는 의미도 있다. ‘동시 행동’은 북한의 확고부동한 비핵화 협상 원칙이다.

그렇다고 북한이 협상 초반부터 종전선언을 들고 나왔던 건 아니다. 북한은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지난 7월 6∼7일 세 번째로 평양을 다녀간 뒤 종전선언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기 시작했다. 북한 외무성은 당시 담화에서 종전선언을 ‘이미 합의된 문제’로 표현하며 “미국이 이런저런 구실로 발을 빼려 한다”고 비판했다. 이후 북한 매체들은 종전선언을 ‘한갓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고 스스로 의미를 축소하며 미국에 약속 이행을 요구했다. 김 위원장은 지난 5일 방북한 대북 특사단에 “한·미 동맹과 주한미군 철수는 종전선언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 아니냐”는 입장도 밝혔다. 미 정부 내 종전선언 반대론자들을 겨냥한 메시지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1974년 3월 최고인민회의 이후 미국을 향해 평화협정 체결을 제안해 왔는데, 이는 주한미군 철수를 위한 전략이었다.

미국 역시 입장이 달라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미 정상회담 직후 기자회견에서 “조만간 종전선언이 있을 것”이라고 했었다. 그러나 미 정부 내 다수 분위기는 구체적인 비핵화 조치 없이 종전선언을 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미 정부가 종전선언의 효과를 과대평가하고 있거나, 북한의 비핵화 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리를 걸어놓은 것이라는 해석이 나온다.

외교 소식통은 “남·북·미 모두 비핵화 협상에 국제법 전문가가 참여하지 않아 종전선언의 의미와 효과가 명확하게 정리되지 않고 있다”며 “법적으로 의미가 없는 정치적 선언을 주고 핵 신고를 받아낸다면 이는 미국의 완승”이라고 말했다. 이런 이유로 일각에선 종전선언과 미국이 요구하는 핵 리스트 제출은 등가성이 떨어진다고 본다. 핵 프로그램 신고는 핵 폐기를 위한 핵심 조치로 이 리스트가 확보돼야 비핵화 시간표를 짤 수 있다.

종전선언, 하고 나면 되돌릴 순 없다

종전선언이 정치적 선언에 불과하다고 해도 일단 하고 나면 불가역성을 띤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후 대북 제재의 당위성이 사라져 비핵화 동력을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남성욱 고려대 북한학과 교수는 “북한이 핵무기가 없다면 정전협정을 체결한 지 65년이 지났으니 종전선언을 하는 게 자연스럽다”면서 “그러나 전쟁을 치렀던 상대국이 비대칭적 무기를 갖고 있는데 한쪽에서 전쟁이 끝났다고 말하기는 어렵다”고 지적했다. 남 교수는 “종전선언 이후 김 위원장이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한다고 해도 종전선언을 무를 수는 없다”며 “문서로 약속해도 번복하는 게 국제정치인데, 정치인의 구두 약속만 믿고 종전선언을 하기엔 국제사회가 너무 정글”이라고 했다.

이영조 경희대 국제대학원 교수도 “종전선언 이후 북핵 협상이 순조롭게 진행되면 문제가 없겠지만 협상이 잘 안 된다고 되돌릴 수는 없는 일”이라며 “북핵 위협이 사라지지 않은 상황에서 종전선언을 하는 문제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고 말했다.

권지혜 최승욱 기자 jhk@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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