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김선도 <29> 아픔 간직한 대중 위한 설교에 전념

개인주의 팽배 전도 나서면 냉대… 필사적으로 나그네 위로할 메시지 고민

[역경의 열매] 김선도 <29> 아픔 간직한 대중 위한 설교에 전념 기사의 사진
1980년대 초반 서울 광림교회 전경. 예배 후 성도들이 신사동과 압구정동 일대에서 복음을 전했지만 개인주의 문화 때문에 쌍림동 시절보다 전도율이 떨어졌다.
예상대로 허허벌판이었던 서울 강남구 신사동 일대에 엄청난 인구가 유입됐다. 사람들은 강북에서 강남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예배가 끝나면 수백 명의 성도가 전도를 위해 퍼져 나갔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도의 열매가 쌍림동보다는 못했다. 신사동과 압구정동 일대는 이미 개인주의 문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광림교회에서 나왔습니다. 예수 믿으세요.” “제발 좀 괴롭히지 마쇼.” 문을 쾅 닫아 버리는 가정이 한둘이 아니었다. 어떤 성도는 그 문에 손이 끼기도 했다.

“어떻게 이 문제를 돌파해야 할 것인가. 하나님, 이 간섭받기 싫어하는 사람들, 안일주의에 빠진 사람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합니까.”

돌파구는 설교였다. 나가서 전도하는 방법을 병행하되 머물 교회를 찾아 유랑하는 대중의 걸음을 광림교회에 멈추게 할 설교 소재를 찾아야 했다. ‘강남을 향해 진출해 오는 사람들의 현존 상태는 무엇인가. 그들의 근본적 요구는 무엇인가.’

내가 주목한 것은 현대인들의 이동성과 정착하고 싶어 하는 안정감, 어딘가에 귀속되고 싶어 하는 소속감, 그리고 그 속에서 두려워하는 불안감이었다. 당시 내가 본 사람들은 어딘가에 자신의 존재를 귀속시키고 싶어 끊임없이 방황하는 나그네였다. 마음속에 자기 정체성과 영혼을 상실한 아픔을 간직한 채 오늘의 선택이 내일의 성공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을 표출하고 있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위로와 소망이었다. 그리고 현실적 불안을 넘을 수 있는 긍정을 발견하는 것이었다.

설교 제목을 지을 때도 고민을 많이 했다. ‘윗자리는 아직 비어있다’ ‘생명의 유턴’ ‘제 십자가는 제가’. 영화 제목이 사람들의 이목을 끌듯 나 또한 사람들의 영적인 구미를 돋게 하는 제목들을 고민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설교에 시간과 열정의 전부를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루를 거의 설교를 준비하는 데 썼다. 머릿속은 온통 설교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한 생각을 건지기 위해 독서와 탐구가 일상이 됐고, 무언가 떠오르면 그 생각을 놓치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생각의 구도를 이어 나갔다.

‘생각력’이라고 해야 할까, ‘생각의 지구력’이라 해야 할까. 미국 유학시절 접한 에머슨 퍼스딕 목사는 40분 설교를 위해 40시간 이상이 필요하다고 했다. 1분 설교에 1시간 이상의 노력이 들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그 이야기가 늘 기억 속에 맴돌았다.







설교에 정성을 쏟은 만큼 결실을 볼 수 있었다. 나그네처럼 떠돌던 그들이 발길을 멈췄다.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된 것은 아니었다. 설교를 통한 메시지가 사람들의 마음을 위로하고 소망을 제시해 주는 열쇠가 될 수는 있었다. 하지만 현대인의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고독감은 멀리 떨어진 강단에서 울려 퍼지는 간접적 메시지만으로는 해결되지 않았다. 더 구체적이고 관계적인 손길이 필요했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얘기를 들어주고 관심을 쏟으면서 손잡고 기도해 줄 수 있는 인격적 관계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내겐 그 일을 감당할 만한 시간적 여유가 없었다. 설교와 강의 준비, 예배 인도, 교회 경영만 해도 24시간이 모자랄 지경이었다. 그 몫은 아내인 박관순 사모에게 돌아갔다.

정리=백상현 기자 100sh@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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