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언약] 언약, 메모·자물쇠로 지킬 수 있다면…

[이지현의 두글자 발견 : 언약] 언약, 메모·자물쇠로 지킬 수 있다면… 기사의 사진
이탈리아 베로나 ‘줄리엣의 집’ 정원으로 들어가는 입구에 붙여진 사랑의 메모들.

이전이미지다음이미지

셰익스피어의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인 이탈리아 북부 베로나. 중세시대의 분위기를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카펠로의 좁은 골목길 중간쯤 ‘줄리엣의 집(Casa di Giulietta)’이 있다. 사랑의 성지(聖地)처럼 입구 양쪽 벽에는 연인의 이름과 하트가 그려진 낙서, 사랑의 맹세가 쓰인 메모지, 철문엔 영원한 사랑을 기원하는 빨간색 자물쇠로 빼곡했다.

1500년대에 쓰인 로미오와 줄리엣의 사랑 이야기는 지금도 전해지고, 그 이야기를 기억하며 베로나를 찾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다. 시대가 변해도 운명적인 사랑을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있다는 것이 신비할 따름이다. 이곳이 실제 줄리엣 가족이 살았던 집이라는 구체적인 증거는 없다. 베로나시에서 일방적으로 지정했다. 그러나 세계 각지에서 온 수많은 연인과 관광객이 사랑의 메시지를 남기고 자물쇠를 걸며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곳이 된 이상 이제 진짜인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줄리엣의 집 마당 한쪽 벽면에 푸른 넝쿨 잎이 커튼처럼 드리워져 있다. 맞은편 건물에 발코니가 보인다. 캐풀렛 가문의 줄리엣이 원수지간인 몬테규 가문의 아들 로미오를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을 알고 고뇌하면서 내뱉는 독백이 들리는 듯하다. “그대의 이름만이 내 원수예요. 몬테규 가문이 아니어도, 그대는 그대일 뿐… 장미는 다른 이름으로 불려도 그 달콤한 향기에는 변화가 없을 것을, 로미오 역시 로미오라 불리지 않더라도 본래의 미덕은 그대로 간직하겠지요.”

변치 않는 사랑의 언약을 떠올리게 하는 줄리엣의 집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랑의 언약을 하고 그 약속을 지키고 사는가’란 생각을 했다. 언약은 서로를 구속하는 의무에 근거한 계약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의 헌신을 의미한다.

희생의 약속

‘언약’(言約·Covenant)은 성서에 300회 이상 언급되는 중요한 단어이다. 히브리어 베리트(beriyth)로 ‘구속력을 지닌 협정’을 뜻한다. 베리트의 어원은 제물을 ‘자르다’에서 유래됐다. 히브리인들은 맹세를 보증하는 제물을 잘라 피를 흘리는 관습이 있기 때문에 언약을 ‘피 언약’이라고 했다.

언약은 하나님이 창세 때부터 인간에 대한 사랑과 그분이 원하시는 관계를 나타낸다. 하나님은 언약의 하나님이시며 성서는 언약의 책이고 우리는 언약의 백성이다. 언약은 성서의 기본 개념으로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흐름이다. 구약은 장차 그리스도를 통해 일어날 구원의 언약이며 그 언약의 성취가 신약이다.

사람의 관계엔 ‘계약관계’와 ‘언약관계’가 있다. 언약관계는 현대사회가 사랑이라고 말하는 가슴 두근거리며 그리움에 빠지는 관계가 아니다. 언약은 신의를 저버리지 않는 신실한 행동으로 나타난다.

계약과 언약은 분명히 다르다. 예를 들면 계약은 서명을 요구하지만 언약은 진실한 마음을 요구한다. 계약은 배타적이나 언약은 포용적이다. 계약은 유효기간 안에나 취소하기 전에만 효력이 있으나 언약은 ‘죽음이 두 사람을 갈라놓을 때까지’ 계속된다. 계약은 상대방을 불신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동의이나 언약은 상대방을 신뢰하는 가운데 이루어진 동의이다. 계약은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나 언약은 ‘내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인가’라고 질문한다. 계약은 법과 공권력으로 유지되나 언약은 사랑과 충절로 유지된다. 계약은 편의성에 입각하나 언약은 헌신에 입각한 것이다.

미국의 가정사역자 다나 그레시(Dannah Gresh)는 “결혼이란 자기 자신을 죽이는 ‘희생의 피 언약’”이라며 “크리스천의 언약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보다 배우자를 위한 희생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은 결혼이 함께 살 두 당사자가 협상하고 정부가 공인하는 사회적 계약처럼 여겨지고 있다. 계약은 언제라도 취소할 수 있어 계약 결혼은 깨어질 가능성이 높으나 언약에 근거한 결혼은 파국을 예상하지 않는다. 결혼이란 두 사람만의 세속적인 계약(contract)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드리는 거룩한 언약(covenant)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 로미오와 줄리엣이 죽지 않고 사랑을 이루었다면 평생 행복하게 살았을까. 목숨을 내놓을 듯이 열정적인 사랑을 했던 연인들이 결혼이란 현실에 들어가면 “옛날에 내가 그랬었지”라며 자조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는 언약행위다. 그리스도가 자신을 주심같이 부부가 서로 사랑하라고 성경은 말한다. 배우자에 대한 헌신과 끝없는 사랑, 허물을 덮어주는 사랑, 그런 헌신과 마음가짐으로 살아갈 때 성숙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

계약결혼 vs 언약결혼

하나님의 언약을 통해 신실한 결혼 관계의 원리를 발견할 수 있다. 부부의 언약적 사랑이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근거한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언약을 맺으셨다. “아무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자가 없으리라.”(롬 8:38∼39) 하나님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사랑이다.

언약결혼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조건 없는 사랑과 용서 위로 그리고 소망 안에서 이뤄지는 부부관계를 의미한다. 성서는 하나님께서 넘치는 은혜와 자비를 주셔서 우리의 약점들과 죄로 오염된 성품을 이기고도 남음이 있도록 도와주신다고 약속하셨다.(롬 8:37) 하나님의 은혜를 떠난 언약결혼은 불가능하다.

“계약은 사람들의 편의를 위한 것이지만, 언약은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계약은 깨어질 수 있으며 그럴 경우 계약 당사자에게 금전적 손실을 끼치지만, 언약은 폐기할 수 없으며 언약을 어길 경우 관계가 손상됩니다. 계약은 사람이 보증하는 것이지만, 언약은 하나님이 친히 보증하시는 것입니다.”(폴 E 팔머의 ‘결혼은 하나님과 맺은 언약입니다’ 중에서)

언약은 서로를 구속하는 의무에 근거한 계약이 아니라 조건 없는 사랑의 헌신이다. 따라서 언약 관계는 힘이 아닌 사랑에 의해, 권리가 아닌 책임에 의해 정해진다. 헌신이 전제되지 않는 결혼생활은 변화에 따라 위기를 만날 수 있다. 성서는 결혼이 언약임을 분명히 한다. 결혼은 하나님 앞에서 한 언약이며 그분이 친히 보증하시는 거룩한 언약이란 성서적 개념을 재확인해야 한다.

반면 현대 자본주의는 계약 중심의 사회이다. 사람들은 사용자와 근로자의 계약 관계를 중심으로 산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고 거룩한 관계인 결혼마저도 조건과 의무와 권리를 분석한다. 김종환 서울신대 명예교수는 “결혼을 결심할 때 자기 권리와 욕구 충족을 고려하고 ‘이 사람과 결혼하면 내가 당연히 누려야 할 것을 누릴 수 있을까’란 질문을 한다면 그 결혼은 언약이 아니라 계약에 입각한 일종의 거래다”라고 말했다.

하나님이 계획하신 결혼은 계약이 아니라 그분이 친히 증인이 되시고 보증하시는 거룩한 ‘피 언약’이다. 결혼은 언약이란 안전그물이 없으면 일생 지속하리라고 장담할 수 없는 힘들고 위험한 서커스이다.

미국의 신학자 게리 토머스(Gary Thomas)는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예수님을 자유롭게 섬기고자 한다면 더 할 말이 없다. 독신으로 지내라. 결혼하면 시간을 많이 뺏기게 마련이다…. 그렇지만 예수님을 닮고자 한다면 결혼하는 것이 가장 좋은 길이다. 결혼이란 사랑과 행복의 길이지만 자기희생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결혼은 방학도 없고, 휴가도 없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닮아가도록 우리를 다듬어가는 ‘훈련의 장’이다. 그리스도인의 결혼은 언약 결혼이어야 한다. 그래야 수많은 어려움을 이겨낼 수 있다.

▒ 언약에 하나 더
관광객들이 찾는 줄리엣의 집 사랑이 이뤄지는 ‘동상’ 있다


이탈리아 베로나시 카펠로 23번지 ‘줄리엣의 집’ 정원으로 들어가면 줄리엣의 발코니가 보인다. 집 앞마당까지는 무료로 관람할 수 있으나 발코니가 있는 건물 2층으로 올라가기 위해선 별도의 입장료를 내야 한다.

희곡 ‘로미오와 줄리엣’의 마지막 대목에서 사랑을 지키려다 결국 죽음을 맞은 두 연인 앞에서 로미오의 아버지는 줄리엣 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다. “순금으로 그대 따님의 동상을 세우겠소. 베로나의 이름이 남아있는 한 진실하고 신실했던 줄리엣의 모습이 세상의 찬양을 받도록 말이오.”

줄리엣의 집 마당엔 실물 크기의 줄리엣 동상이 서 있다. 줄리엣 동상의 오른쪽 가슴을 만지면 사랑이 이뤄진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이미 동상의 오른쪽 가슴 부분은 무척이나 닳아있다.

줄리엣의 집은 1300년대 지어진 고딕스타일의 르네상스 건축물이다. 실존했던 줄리엣의 집은 아니다. 베로나시 측에서 관광산업 활성화를 위해 ‘로미오와 줄리엣’의 무대를 베로나로 상정하고 줄리엣의 집을 임의로 꾸몄다. 베로나시는 달 카펠로(Dal Capello) 가문이 14세기부터 보유해온 이 집을 구입했다. 줄리엣의 가문, 캐풀렛(Capulet)과 발음이 비슷한 점을 고려했다고 한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영원한 삶의 주제, 그리움의 향수를 간직한 여행객들은 끊임없이 줄리엣의 집을 찾고 있다.

베로나(이탈리아)=글·사진 이지현 선임기자 jeehl@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