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다시 생각하는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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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누가복음 10장)에 등장하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피해자를 외면한 대의명분은 아마도 율법주의적 합리화, 즉 제사를 집례할 책임을 맡은 자로서 시체를 접하지 말아야 할 정결 규례가 그럴 듯한 핑계였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율법의 정신, 즉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구현해야 할 책임으로부터 면죄부를 받을 수는 없었다. 그들이 율법의 정신을 바로 깨달았다면 제사보다 순종을 선택해(삼상 15:22)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이웃’이 됐어야 했다.

그들보다 율법의 정신을 제대로 이해한다고 자부하는 현대 교회는 과연 유사한 상황에서 위험과 손해를 무릅쓰고 피해자의 선한 이웃이 돼주고 있는가.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에게 선한 이웃으로 다가가지 못하도록 방해한 장해물이 율법주의뿐이었을까.

아마도 더 현실적이고 인간적인 이유는 두려움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 사람을 구하고 치료하는 데 필요한 재정적 부담을 내가 왜 감당해야 하는가. 아니, 아직 주변에 숨어있을지 모르는 강도가 나까지 공격하면 어떡하는가. 이미 죽었을지 모르는 사람을 섣불리 돕겠다고 나섰다가 봉변을 당하고 손해를 볼 필요가 있을까. 저 사람이 내 가족이나 지인도 아닌데 굳이 위험 부담과 손해를 자초하면서까지 도와주려는 건 불필요한 오지랖이 아닐까. 이런 우려와 두려움 말이다.

그래서 신자-불신자 구별 없이 현대 사회는 불행을 당한 이웃을 외면하는 게 큰 잘못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당연시하는 기현상이 팽배하다. 여기에 신자유주의라는 극단적 개인주의가 합세하면서 공동체적 연대감이 실종된 채 각자도생을 바람직한 덕목인 양 부추기는 살벌한 세상이 되고 말았다.

기독교 역시 어느덧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종교가 아니라 타인의 불행을 외면한 채 이기적 분복만 챙기는 무당종교로 전락하지 않았는지 심히 걱정되는 병리현상이 가득하다. 소위 믿는다는 부모가 자녀에게는 예수 믿고 복 받아 대박 나고 만사형통하라고 축복하면서도, 강도 만난 이웃을 도우려다 위험과 손해를 감수하는 일은 아예 생각도 못하게 하는 경우가 많다는 푸념을 청소년들이나 젊은이 대상으로 사역하는 분들에게 종종 듣는다.

미국의 마틴 루서 킹 주니어는 1968년 4월 3일 테네시주 멤피스에서 선포한 그의 마지막 설교에서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룬다.

임박한 자신의 암살(4월 4일)을 감지한 듯한 그의 설교는 비장하고 의미심장한 도전을 청중에게 던진다. 제사장과 레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하고 맨 처음 떠올린 생각은, ‘만일 내가 가던 길을 멈추고 이 사람을 돕는다면 내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라는 질문이었다. 그들이 마땅히 도왔어야 할 피해자를 결국 외면하게 된 것은 그릇된 질문을 던졌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반면 성경에 등장하는 사마리아인의 질문은 오늘의 교회와 그리스도인이 던져야 할 바른 질문이다. ‘만일 내가 가던 길을 멈추지 않고 피해자를 비켜간다면 그 사람에게 무슨 일이 일어날까.’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이 피가 되도록 고민하며 기도하시던 그리스도께서 만일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그릇된 질문으로 십자가를 포기하셨다면 세상은 어떻게 됐을까. 현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짐짓 외면하거나 회피하고 있는 강도 만난 이웃은 누구인가.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요 20:21) “누구든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8:34)

정민영(전 성경번역선교회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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