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박재찬] 각자도생 기사의 사진
집 근처 삼거리 횡단보도 앞에는 전기통닭구이 푸드 트럭이 종종 자리를 잡는다. 불과 며칠 전이다. 3년 넘게 그 트럭을 봐 왔는데 평소와 다른 풍경이 눈에 먼저 들어왔다. 트럭을 주차한 인도 쪽으로 작은 탁자가 세워져 있었고 그 위엔 양말 꾸러미들이 여럿 보였다. ‘통닭만 팔아선 먹고살기 힘든가 보구나’ 하고 짐작했다. 비슷한 광경을 수개월 전에도 본 것 같다. 출퇴근 때 지나치는 지하철역 인근에서 다코야키를 파는 가게에서다. ‘1개 1000원’이라고 적힌 종이 아래 바구니에는 칫솔이 수북이 담겨 있었다. ‘다코야키를 사 먹으면서 칫솔까지 사갈 사람이 얼마나 될까’ 생각했다. 그러면서 맞은편 과일가게를 보니 칫솔은 약과였다. 가게 벽에 ‘금이빨 삽니다’라는 빛바랜 문구가 붙어 있었다. 제법 오래된 것 같았다.

하루 벌어 살아가는 영세 자영업자들은 수입이 일정치 않다. 그렇다 보니 현금이 들어오는 거라면 뭐라도 팔아보자는 절박함이 통닭에 양말까지, 다코야키에 칫솔까지 팔게 만드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형편이 어려우니 저마다 어떻게든 알아서 살 길을 마련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각자도생(各自圖生)하는 것이다. 각자도생이란 말은 지난해 초쯤 유행했다. 직전 해에 미국에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당선되고, 영국의 브렉시트(EU탈퇴 법안 통과)로 나라들마다 제 살 길 찾아간다는 뜻으로 자주 오르내렸다.

요즘 한국 사회 속에서도 각자도생을 부추기는 현상을 찾아볼 수 있다. ‘학교폭력 전문 심부름센터’ 같은 게 대표적이다. 학교폭력 피해자를 고객으로 하는 심부름 업체를 말하는데, 하는 일이 대략 이렇다. 교내 폭력 피해자들의 의뢰를 받아 ‘증거용’ 폭행 현장 사진을 찍어주거나 가해 학생 부모의 직장에 찾아가 난동을 부리는 대가로 돈을 받는 것 등이다.

학교 안에는 학교폭력대책자치위원회가 있다. 하지만 학교 측이 폭력 사건을 축소·은폐하는 경우가 많아 피해자 부모들이 직접 나서면서 이런 업체의 성업을 부르고 있다. 엄연히 제도가 마련돼 있는데도 학교를 향한 깊은 불신이 학부모들로 하여금 각자도생의 길로 가도록 하고 있는 셈이다. 한국 사회의 서글픈 현실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인적·경제적 자본에 이어 ‘사회자본’을 강조했다. 사회 구성원들 간 연대와 협력으로 대표되는 ‘보이지 않는’ 자본이다. 사회자본이 잘 형성된 사회에서는 구성원들 간 네트워크가 잘 구축돼 있고,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와 준법정신도 높다. 특히 신뢰는 사회자본의 핵심 요소다. 퍼트넘은 신뢰도가 높은 사회일수록 상호 조정과 조율, 공공정책 수행도 잘 이뤄진다고 말한다. 정치·경제·사회 개혁 또한 신뢰도가 낮은 사회보다 속도가 빠르다. 서로 믿지 못해 벌어지는 갈등에 따른 조정·중재 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작금의 한국 사회는 사회자본의 빈약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다. 특히 공공정책 분야에 대한 불신 풍조는 심각하다. 29만건이 넘어선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에는 정부 정책과 제도를 도저히 믿지 못하겠다는 식으로 올린 글이 수두룩하다. 정책 사각지대에 몰린 가장 또는 주부가 극단적 선택을 했다는 뉴스도 잊을 만하면 터진다.

가장 심각한 건 경제주체들 간의 불신이다. 각종 정책을 두고 정부와 기업, 가계 사이에 불신과 반목의 골이 깊다. 현 정권의 경제정책 기조를 두고 야당과 언론이 연일 경종을 울리고 있지만 들리는 건 “기다려 달라”는 정도의 답변이다. 정권 출범 이래 8번째 집값 대책이 나왔는데, ‘이걸로 되겠나’ 하는 비아냥이 스스럼없이 나온다. 이 같은 반응 속엔 상대에 대한 불신이 배어 있다.

각자도생이 더 이상 조롱조로 쓰이지 않으려면 정부 정책의 신뢰 회복이 먼저다. 전기통닭구이 주인이 양말에 속옷까지 내놓거나, 다코야키 사장님이 칫솔에다 치약까지 세트로 파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박재찬 경제부 차장 jeep@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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