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돋을새김-고승욱] 순서가 틀렸다 기사의 사진
바둑에 수순 착오라는 말이 있다. 같은 수인데 순서가 잘못되면 결과가 달라진다. 한 번씩 두는 게 룰이니 당연하다. 먼저 먹여쳐야 할 수를 나중에 두면 상대방이 슬쩍 피하고 만다. 어쩔 수 없이 그 자리에 두도록 강제하지 못한 탓이다. 다 잡은 대마를 놓치는 것은 물론이고 쫓아가던 돌이 되레 죽는다. 천하의 이세돌도 수순 착오를 피하지 못해 국제대회 결승전에서 고배를 마시기도 했다.

바둑은 오락이지만 나랏일은 현실이다. 수순이 틀리면 고통 받는 사람이 생긴다. 얼마 전 집 근처에 산책로가 생겼다. 기초자치단체인 구청에서 조성한 길인데 지도가 그려진 세련된 안내판이 곳곳에 세워졌다. 전체 5개 코스 중 평소 가고 싶었던 낮은 산을 오르는 길이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안내판을 보며 부지런히 따라갔다. 그런데 산 입구에서 길을 찾을 수 없었다. 돌아다니며 물어봐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결국 다산콜센터를 거쳐 구청 담당과로 전화를 했다. 대답은 놀라웠다. 아직 만들지 않은 길이라고 했다. 예산도 확보하지 못해 언제 조성될지조차 알 수 없다고 했다. 안내판에 ‘조성 중’이라고 써야 하는 것 아니냐고 물었더니 업자에게 안내판을 그렇게 고치라고 말하는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구청은 나머지 4개 코스를 홍보하고 싶었을 것이다. 담당자는 다섯 개 코스 중 고작 한 개를 놓고 ‘전화질’을 한 사람을 야속하게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공무원의 수순 착오는 시민의 불편함으로 이어진다. 불편으로 끝나면 좋은데 신뢰마저 잃게 된다. 성과를 과장하기 위해 알면서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 정도는 참을 수 있다. 1, 2년 정도 나머지 4개 코스를 걸으며 느긋하게 기다리면 된다. 좋은 취지로 시작했으니 사업이 중단되지 않을 것이고, 몇 년 안에 이사할 생각도 없다. 하지만 우리의 삶 전체를 쥐고 흔드는 부동산 정책이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정부의 수순 착오는 국민의 삶을 피폐하게 한다. 대표적인 게 지난해 나온 8·2 부동산대책이다. 집을 여러 채 가진 사람이 집을 팔도록 유도해 공급을 늘린다. 대출을 억제하고 실수요자에게만 집을 살 기회를 제공해 수요를 누른다. 하지만 순서가 틀렸다. 다주택자가 집을 팔도록 하는 수를 빠트렸다. 이들은 집을 파는 대신 갑자기 혜택이 많아진 공공임대사업자로 전환했다. 시장이 요동치자 집을 살까말까 고민하던 사람들이 더 늦기 전에 사겠다고 마음을 바꿨다. 공급은 줄고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었으니 가격이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투기세력이 일제히 발호한 게 아니라 수요공급 법칙에 따른 시장원리가 작동했다. 주택보급률이 100%가 넘어 집으로 돈을 버는 시대는 지났다는 막연한 희망은 어리석은 생각이었음을 많은 사람이 몸으로 느꼈다. 정부를 믿은 게 잘못이라는 한탄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문재인정부 부동산 정책은 그렇게 신뢰가 무너졌다. 그런 마당에 “강남에 살아보니 별거 아니다”라고 약을 올리니 화가 나지 않을 수 없게 됐다.

그렇다면 얼마 전에 나온 9·13 부동산대책에 수순 착오는 없을까. 아직까지 9·13 대책은 ‘8·2 대책 버전2.0’에 불과하다. 가장 중요한 공급을 늘리는 방안이 빠졌다. 돈줄을 틀어막아 수요만 억제하는 정책은 시장에서 통용되지 않는다는 것을 아프게 경험했으면서도 순서가 또 틀렸다. 그린벨트 해제 여부를 놓고 서울시와 조율이 안됐다는 말은 변명으로만 들린다. 공급 대책을 오는 21일 발표할 것이면 9·13 대신 9·21 대책이 나왔어야 했다.

추석 전에 뭔가를 보여줘야 지지율 하락을 막을 수 있다는 조급증 탓이라면 오히려 다행이다. 믿지 못하고 분노가 생긴 마음은 전혀 다른 곳을 향한다. ‘강남 사는 공무원들이 만든 부동산 정책에 강남 집값이 오르는 것은 당연하다.’ ‘지금 정부가 만드는 대책의 마지노선은 강남을 포함한 서울의 아파트 값을 떨어뜨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마타도어여도 할 수 없다. 신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고승욱 편집국 부국장 swko@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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