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창림의 명화로 여는 성경 묵상] 흘린 이삭은 가난한 사람이 먹게 하라

[전창림의 명화로 여는 성경 묵상] 흘린 이삭은 가난한 사람이 먹게 하라 기사의 사진
밀레의 '이삭 줍는 여인들'│ 1857,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오르세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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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우리나라에서 밀레의 작품 전시회를 했는데 한 관람객이 티켓 반환을 요구하는 소동이 있었다고 한다. ‘이삭줍기’가 없는데 어찌 밀레의 전시회라고 할 수 있느냐는 게 이유였다. 1857년 파리 살롱전에 출품한 이 작품은 ‘만종’과 함께 밀레의 대표작이다.

프랑스 파리 근교의 바르비종에는 여러 화가들이 모여 살며 농촌과 전원을 그렸는데, 이들을 바르비종파로 불렀다. 다른 바르비종파 화가인 루소, 코로, 트루아용, 도비니 등은 자연의 풍경을 서정적이고 목가적으로 그렸으나 밀레는 농촌이 아닌 농부, 풍경이 아닌 인간을 그렸다. 농부를 그렸다고 해도 초상화적으로 접근한 것이 아니라 농부의 노동 자체를 마치 역사화처럼 그렸는데, 비참함을 느끼도록 그린 것도 아니고 ‘가난해도 나름 행복해요’ 식으로 미화하지도 않았다.

밀레는 등장인물의 얼굴이나 표정을 자세히 그리지 않았다. 개인화하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종교화나 신화화처럼 엄숙하고 경건함을 느끼는 화면을 창조했다. 바르비종파를 자연주의라고 할 수 있으나 밀레만은 오히려 사실주의적이라고 할 수 있다. 밀레는 이 작품을 현장에서 얻은 영감으로 단시간에 그린 것이 아니다. 이 작품을 위한 데생이 여러 점 전해지고 있고, 1854년 세로로 긴 화면으로 한 번 그린 그림을 계획해 다시 그린 그림이다. 여인들의 옷과 자세, 색채도 면밀하게 연구하고 연출한 결과이다.

푸르지 않은 하늘과 황톳빛 너른 들판에서 세 여인은 빨강, 파랑, 하얀색의 모자를 쓰고 있어 마치 고대 그리스의 신화나 성서의 영웅처럼 근엄하고 경건하게 보인다. 여인들의 자세도 극히 과학적이고 연출적이다. 가장 오른쪽 여인은 이삭을 찾고 있고, 가장 왼쪽 여인은 이삭을 향해 손을 뻗고 있고, 가운데 여인은 이삭을 줍고 있다. 이삭을 줍는 동작을 세세히 분석한 세 동작을 시차별로 그렸다. 밀레가 그린 가난한 농촌의 여인들에게서는 가난한 비참함도 느낄 수 없지만, 가난해도 나름 행복해요 식으로 미화도 하지 않았다.

멀리 전혀 다른 세상이 보인다. 풍요로운 곡식이 엄청난 높이로 쌓여 있고 일꾼을 부리는 사람이 높은 말 위에 앉아 있다. 성경 레위기 23장을 보면 추수할 때 흘리는 이삭을 그대로 두어 가난한 사람들이 주워 먹게 하라는 율법이 나온다. 밀레는 농촌의 풍경과 농부의 삶을 그렸으나 분명히 사회적 종교적 메시지를 준다. 성서가 기록된 2000년 전이나 밀레가 이 그림을 그리던 150년 전이나 똑같이 지금도 빈부격차가 크고 가난한 사람들은 고통당한다. 이것이 어디 경제적인 문제만이랴.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은 강한 사람들에게 상처받고 고통받는다. 없는 사람들과 나그네를 위해 이삭을 남기라는 여호와의 율법은 이제 보편적인 삶의 철학이다. 이삭을 줍기라도 할 수 있는 밀레의 이 농촌보다 어쩌면 우리는 더 각박한 사회를 만들고 있는지 모른다. 하나님께 나아가기 전에 이웃부터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

“너희가 너희의 땅에서 곡식을 거둘 때에

너는 밭모퉁이까지 다 거두지 말고

네 떨어진 이삭도 줍지 말며, 네 포도원의 열매를 다 따지 말며

네 포도원에 떨어진 열매도 줍지 말고

가난한 사람과 거류민을 위하여 버려두라

나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이니라”(레위기 19:9∼10, 23:22)

#장프랑수아 밀레(1814∼1875)=밀레는 파리 북서쪽 노르망디 그레빌의 작은 농촌마을 그뤼시에서 전형적인 가톨릭 집안의 8남매 중 둘째이자 장남으로 태어났다. 당시 화가들의 등용문이었던 살롱전에 여러 번 출품했으나 계속 낙선하다가 1840년 초상화가 당선돼 화가의 삶을 시작했다. 첫 아내 폴린 비르지니 오노가 결혼한 지 3년 만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이듬해 카트린 르메르와 동거했으나 밀레의 가족들이 그녀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어머니가 사망할 때까지 왕래하지 않고 살면서 9명의 자녀를 낳았다.

밀레는 1848년 파리 근처 퐁텐블로 숲가의 바르비종으로 이주하면서 농부들의 삶과 풍경을 그리기 시작했다. 밀레의 작품은 종교성을 짙게 띤 목가적이고 서정성 높은 분위기로 알려져 많은 인기를 누렸다. 말년에는 사회적으로도 인정받고 영예도 누려서 1868년 프랑스 최고의 영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까지 받았다. 전 세계 어디를 가나 그의 복제품을 볼 수 있으며 고흐나 우리나라의 박수근이 이상적인 화가로 꼽을 만큼 많은 역사적 대가들이 밀레의 영향을 받았다. 부모의 허락을 받지 못한 두 번째 아내와 1875년 1월 3일 교회에서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리고, 며칠 지나지 않은 1월 20일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가 사랑했던 바르비종에 루소와 함께 나란히 묻혔다.

전창림 홍익대 바이오 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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