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정인찬 <1> 어려서 부모님 여의고 하나님 아버지 위로받아

잃은 것보다 더 큰 것 채워주셔… 역경 이기고 목회·교수 생활에 큰 힘

[역경의 열매] 정인찬 <1> 어려서 부모님 여의고 하나님 아버지 위로받아 기사의 사진
정인찬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총장이 26일 경기도 용인에 있는 학교 총장실에서 인터뷰를 하고 있다. 웨신대 제공
내가 태어난 곳은 ‘한국의 나폴리’라고 불리는 경남 통영이다. 통영은 경치가 아름다워 한국에서 살아도 외국에서 사는 기분이 들었다. 고기잡이가 잘돼 인심이 좋았고 통영의 나전칠기 장롱과 김밥은 전국 제일이다. 또한 유명한 문학가와 시인이 많이 나온 고장이기도 하다. 지금도 나는 고향을 그리워하며 살고 있다. 월남한 가족들이 자기가 태어난 북한 고향땅을 그리워하는 것같이 말이다.

나는 1942년생이다. 아버지 정상용과 어머니 김복덕의 장자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공부를 많이 하신 분이다. 할아버지는 자신의 아들을 일본으로 유학을 보내 공부하게 하셨다.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뒤 어머니와 결혼했고 유영학원에서 교사로 일했다.

부모님 덕에 다복하게 살았다. 하지만 그런 다복함은 오래가지 않았다. 아버지가 과로로 쓰러지신 것이다. 내 나이 5세 때였다. 아버지는 그렇게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가셨다. 그리고 어머니마저도 그 뒤를 따라가셨다. 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삼촌 고모 사촌 등 대가족 틈에 끼어 살게 됐다.

이후 수년간 아버지 어머니가 있는 아이들이 가장 부러웠다.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니 외로웠던 것 같다. 그런데 특별한 일이 일어났다. 친구를 따라 교회에 다니게 된 것이다. 교회학교에서 매주 예배를 드렸다. 여름성경학교 때 재밌게 놀고 찬송을 부르며 성경말씀을 배운 기억이 난다. 특히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르며 읽는 성경 구절이 참 좋았다. 그런 설교와 찬양이 나올 때마다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몰려왔다. 예배를 드리는 동안 울다가 예배를 마친 기억이 난다.

어린 나이였지만 그때 이렇게 생각했다. ‘육신의 아버지는 내게 오지 못한다. 그래 슬퍼만 하고 있을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를 나의 참 아버지로 모셔야지.’

어린 마음이었지만 그렇게 결심하고 나니 마음이 평안해졌다. 아니 기뻤다. 지금 돌이켜보면 더 좋은 것을 채워주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다.

할머니는 나를 보고 “네 아버지는 집안에 큰일이 생기면 그 일을 해결할 사람이 필요하다며 인찬이 너를 꼭 법대에 보내 검사를 만드는 게 꿈이었다”고 말씀하셨다. 만약 아버지가 살아계셨다면 검사를 지망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 영혼을 책임지는 목사가 됐다.

나는 부모를 잃었으니까 많은 것을 잃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분의 더 큰 뜻과 섭리를 깨닫고 나니 잃은 것보다 더 큰 것으로 채워주셨음을 새삼 느끼고 살고 있다. 역경을 이기는 도약이 된 것이다. 목회자나 교수생활을 하는 데 큰 힘이 됐다. 이것저것 채워주시는 하나님. 잃은 것보다 더 좋은 것으로 채워주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의 뜻을 더 깊이 알아가는 것이야말로 신앙의 성숙이 아닌가 싶다.




정리=유영대 기자 ydyoo@kmib.co.kr

약력=△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석사, 미국 샌프란시스코 신학대 박사 △국제개혁신학대학원대 총장, 미주기독교총연합회 대표회장, 세계선교협의회(KWMC) 대표회장, 미국독립교회연합회 총회장, 휴스턴한인교회 담임, 세계성령중앙협의회 대표회장, 백석대 목회대학원장, 백석신학대 학장 역임 △현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 총장, 국제독립교회연합회(WAIC) 연합회장, 새창조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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