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전철] 마지막 인사 기사의 사진
초등학교 시절 친구의 자살 소식에 매우 놀랐다. 자살 이유는 가정사였다. 타인의 자살을 처음 대면했다. 유학 시절 독일 기숙사에서 같이 살았던 친구가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자살에 필요한 모든 도구를 다 준비한 채. 자살은 우리 사회의 심각한 문제이다. 한국은 자살공화국의 오명을 얻었다. 특히 10대∼30대 사망 원인 1위가 자살이다.

한강 다리에는 세상과 이별을 앞두고 누군가와 마지막 통화를 할 수 있는 전화기가 있다. 그 채널은 이생을 접고 투신하려는 사람과 그를 살리려는 사람 사이의 마지막 이야기를 연결한다. 세상에서 가장 힘든 동시에 가장 고귀한 협상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된다. 그 라인은 삶을 포기하려는 이들을 구하는 지상의 마지막 생명줄이다. 이 세상 마지막 다리에 놓여 있는 유일한 출구는 생명의 전화이며 사랑의 전화이다.

생명을 개인적이며 사회적 고통과 무관한 고귀한 선물로 본다면 자살은 심각한 선택이 된다. 그러나 자살을 개인의 어리석은 선택으로만 본다면 그의 영혼이 얼마나 가혹하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서 있었는지를 놓치기도 한다. 하여 우리에게 심화된 자살의 인간학과 사회학이 필요하다. 대한민국 개인의 자살에 사회적 타살의 측면이 적지 않다. 쌍용차 사건이 일어난 지 9년이 지나서야 해고자 119명의 전원 복직 합의가 이뤄졌다. 이 기쁜 소식 이면에는 극단적인 선택과 스트레스로 인한 심장마비 등으로 목숨을 잃은 해고자 30여명의 슬픔이 있다. 이 합의는 많은 가족의 고통과 희생이 빚어낸 슬픔의 꽃이다. 실로 개인의 고통은 동시에 가족의 고통이다. 쌍용차 해고자 아내의 48%가 최근 1년간 진지하게 자살을 생각해본 적 있다는 충격적인 연구 결과가 이를 증명한다. 이 수치는 일반적인 상황에 비해 8.6배나 높은 비율이다.

미국 신경생리학자 존 릴리는 항공우주국(NASA)의 지원으로 1963년 카리브해에서 인간과 동물의 의사소통 연구를 시작한다. 릴리는 연구 성과를 위해 향정신성 약물 엘에스디(LSD)를 돌고래 피터에게 투여했지만 이는 파국의 시작이었다. 1966년 연구는 종료되고 피터의 친구인 연구원 로바트도 떠난다. 생명을 유지하는 호흡은 매우 의식적인 노력이다. 삶이 너무 버거우면 인간과 동물 모두 다음 호흡을 하지 않는다. 피터는 의식적 호흡을 멈추었다. 그의 죽음은 자살인가 타살인가. 개인의 아픔은 사회적 고통의 감염과 체현의 성격을 지닌다. 특히 민감하고 연약한 개인은 사회적 고통에 더 쉽게 노출되며, 심지어 미래의 고통을 대리적으로도 경험한다. 사회의 거시적 고통을 개인적으로 감당하는 것은 너무나 버겁고 가혹하다. 특히 개인의 죽음과 자살은 공동체적 삶의 취약성이 개인적으로 출몰하는 신체적이며 정신적인 폐허이다.

복합적 사회가 그려내는 병리와 그림자의 얼룩은 약한 개인에게는 큰 덫이자 심연이다. 하여 자살과 타살의 경계 설정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회와 연대성의 취약함이 어떻게 개인의 희생으로 전이되는가의 문제다. 자살에는 혹독한 고통과 대리적 참회가 있다. 종교가 도덕과 윤리의 정거장을 지나가는 열차라면 자살의 주홍글씨를 새기는 것에만 몰두하면 안 된다. 오히려 우리는 개인의 사라짐에서 더불어 사는 삶의 길과 주님의 지혜를 물어야 한다.

우리는 홀로 살지 않는다. 홀로 살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 말처럼 홀로 살려면 짐승이거나 신이어야 한다. 자살(自殺)의 ‘자’와 타살(他殺)의 ‘타’보다 더 중요한 것, 그것은 ‘살(殺)’의 연대적 극복이다. 죽은 자는 산 자에 의해 제대로 이해받지 못한다고 니체는 말한다. 우리는 어쩌면 지금 죽었으며, 죽어가고 있다. 그들이 남긴 마지막 인사들이 정오의 태양 아래 가득 놓여 있다. 그들이 아프게 부대꼈던 과거의 기억, 그들이 뜨겁게 꿈꾸었던 미래의 기대. 사라진 이는 말이 없다. 그러나 사라진 이들의 차가운 기억과 뜨거운 기대가 오늘 우리 삶에 이렇게 생생하게 공존하고 있다.

전철 한신대 신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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