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인사이트] 아버지의 고기 한 근 기사의 사진
아버지는 민망할 정도로 친절하고 선한 분이셨다. 허리 꾸부정한 노인이 무거운 짐 들고 버스에 올라서면 누구보다 앞서 나가 부축하며 자리를 양보했고 모르는 사람들이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셨다. 교회에서 교인들에게 인사할 때도 지나치게 허리를 굽혀 보기 거북할 정도였다. 또 누구보다 부지런하셨다. 버스를 두 번이나 갈아타며 다른 군에 있는 중학교로 출퇴근하면서도 새벽기도에 다녀오신 뒤 잠시도 쉬지 않았다. 집 인근 길에 철마다 꽃씨를 뿌리고 보살펴서 시장상을 받기도 했다.

16년 전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지방 교회의 목사님은 주일예배 시간에 “예수님의 모습을 보려면 고 ○○○ 장로님을 보라”며 항상 낮은 자세의 아버지를 추모했다. 그러면서 우리도 몰랐던 일화를 들려줬다. 아버지는 박봉의 교사 월급에도 매달 월급날이면 고기 한 근을 사 갖고 목사님 댁에 들렀다고 한다. 지방 소도시에서 도청 소재지로 이사하면서 그 교회에 다니기 시작했으니 15년간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고기로 주님의 종을 대접하고 섬겼던 셈이다. 넉넉지 않은 살림에 작은 물질이지만 목사님을 대접하고자 했던 마음 씀씀이에 온 교인이 눈시울을 붉혔던 기억이 난다.

추석 때 고향에 내려가 가정예배를 드리면서 요즘에도 아버지처럼 목회자를 지극정성으로 섬기는 교인이 있을까, 그렇게 교인들과 세상으로부터 존경받는 목회자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제강점기 주기철 목사는 신사참배 반대를 하다 네 차례나 검거돼 옥고를 치렀다. 일제는 모진 고문으로 주 목사를 회유했지만 그는 못판 위를 걸으면서까지 신앙을 굽히지 않았다. 한센병 환자들의 피고름을 빨며 이들을 돌본 손양원 목사는 여순사건 때 두 아들 동인과 동신을 잃은 뒤 아들들을 죽인 청년을 양자 삼았다. 그러면서 아홉 가지 감사기도를 드렸다. “나 같은 죄인의 혈통에서 순교의 자식들을 나오게 하신 것도 감사하고 하나도 아니고 두 아들을 순교하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나의 두 아들을 총살한 원수를 회개시켜 내 아들 삼고자 하는 사랑의 마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니다”라고 했다.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하는 자를 위해 기도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몸소 실천한 목회자였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모자원과 고아원을 세워 가난한 이들을 돕고 청빈하게 살다 간 한경직 목사, 평생 통장 한 번 갖지 않은 그가 타계한 뒤 마지막 거처한 남한산성 6평 남짓한 우거처에 남은 것은 40년 이상 사용한 낡은 침대와 옷장뿐이었다. 일곱 번의 간암 수술을 받고 신부전증으로 혈액 투석을 받으면서도 목회를 계속한 하용조 목사, 장애아들을 위해 서울 강남 한복판에 장애아 학교를 설립하고 일자리까지 마련해주고 있는 홍정길 목사, 우리 주변에는 존경할 만한 믿음의 1세대 목회자가 많이 있었다. 캄캄하고 힘든 터널을 지나면서도 이들을 보면서 길을 잃지 않고 한 줄기 빛을 향해 나아갈 수 있었고 돌부리에 치이고 세상에 좌절할 때마다 위로를 얻었다.

그러나 지금의 한국 교회는 어떤가. 나라와 어려운 이들을 위해 기도하고 돌보는 선한 목자들을 찾기 힘들다. 고기 한 근 대접하고 싶은 목회자들이 있는가. 잘못을 꾸짖고 바른말 하는 어른다운 어른도 드물다. 민족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가장 먼저 희망을 얘기하고 구원의 손길을 내밀던 목회자들은 어디에 있나. 한국 교회에 등 돌리는 이들이 늘고 있는 것도 어찌 보면 교회가 자초한 일이다. 세속화되고 탐욕스러워진 교회에 더 이상 무엇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물질주의와 이기주의가 똬리를 틀면서 세상의 근심을 사는 일들이 교회에서 벌어지고 있다. 교계를 처음 취재하는 후배는 말한다. 대형 교회 목회자나 장로 만나는 일이 대기업 임원 만나는 것보다 힘들다고. 섬기기 위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은 가장 낮은 말구유에서 태어나셨다. 그런데 예수님의 사랑과 섬김을 실천해야 할 이들이 권위적이고 철옹성에 갇혀 세상 소리에 귀 막고 눈 감고 있으니 소돔과 고모라의 심판이 멀지 않은 듯 느껴진다.

mheel@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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