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태원준] 계절의 여왕 기사의 사진
봄은 완패했다. ‘계절의 여왕’ 타이틀은 이제 가을에 넘겨줘야 한다. 한반도에서 가장 좋은 계절을 꼽을 때 여름과 겨울은 덥고 추워 일찌감치 탈락했다. 많은 문학작품이 봄과 가을을 예찬하며 두 계절의 대리전을 벌여 왔다. 언제부턴가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부르게 되면서 전세는 기울었다. 어느 시인의 작명이지만 우리 봄은 이 왕관을 쓸 만큼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양하의 ‘신록예찬’을 보자.

‘봄 여름 가을 겨울 두루 사시(四時)를 두고 자연이 내리는 혜택에는 제한이 없다. 그 혜택이 가장 아름답게 나타나는 것은 봄. 봄 가운데도 만산에 녹엽이 우거진 이 때일 것이다. 눈을 들어 먼 산을 바라보라….’ 지난 5월 눈을 들어 바라본 산은 뿌연 먼지에 휩싸여 있었다. 봄의 아름다움은 8할이 신록인데 미세먼지가 그 명도(明度)를 깎아내렸다. 지난해 서울의 월평균 미세먼지(PM10) 농도는 5월이 63㎍/㎥(최고치 243㎍/㎥)로 가장 높았다. 3, 4, 5월은 몇 년째 미세먼지 1위를 번갈아 차지하고 있다.

날씨를 맑음과 흐림으로 구분하는 방식은 더 이상 유용하지 않다. 구름의 형태가 선명하게 흐린 날과 구름인지 먼지인지 모를 뿌연 날은 똑같은 흐림일 수 없다. 먼지 탓에 흐린 날이 많아지면서 구름이 끼어도 공기가 깨끗한 날은 오히려 상쾌하다. 맑음의 반대는 탁함이 됐다. 구름 한 점 없는 날이 아니라 먼지 한 톨 없는 날이 진짜 맑은 것이다. 가을로 접어든 요즘이 그렇다.

올 9월은 미세먼지 ‘나쁨’이 하루도 없었다. ‘보통’도 드물었다. 차량 운행이 많았던 추석 연휴에도 전국이 30㎍/㎥ 이하였다. 가을의 한복판인 10월에 서울 강변북로를 달린다면 눈을 들어 먼 곳을 바라보라. 미세먼지 ‘좋음’에 힘입어 123층 롯데타워가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와 있을 것이다. 이양하는 봄에 눈을 들라 했지만 멀리 봐야 할 계절은 이제 가을이다. 잎의 색깔보다 공기의 질이 계절의 아름다움을 규정하는 세상이 됐다.

한반도는 겨울과 봄에 북서풍이, 여름과 가을에 남동풍이 분다. 북서풍은 대륙의 먼지를 몰아오지만 남동풍은 바다를 지나오기에 깨끗하다. 지난여름 공기는 이 가을보다 더 맑았는데 그것을 미처 누리지 못할 만큼 더웠다. 사계절은 차례로 이상기후에 함락되고 있다. 봄-여름-가을-겨울을 먼지-폭염-가을-혹한이라 불러도 어색하지 않다. 가을만 옛 모습을 지키는 중이다. 탐욕이 부른 온난화가 이 계절을 언제까지 그냥 놔둘까, 먼지 한 톨 없는 요즘 하늘이 불안하기만 하다.

태원준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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