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와 예수-김상근] “아버지 살해한 北, 화해 쉽지 않았죠”

민주화·인권운동 활동하다 KBS 이사장 된 김상근 목사

[나와 예수-김상근] “아버지 살해한 北, 화해 쉽지 않았죠” 기사의 사진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 김상근 목사가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자신의 회심 체험과 북한과의 화해 여정 등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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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친은 6·25전쟁 때 북한 정치보위부 요원에게 총살당했다. 발견 당시 몸통에 총알이 박혀 있었고 얼굴은 회칼로 피부가 다 벗겨질 때까지 난도질당한 상태였다. 북한과 김일성을 증오하며 청년기를 보냈고 목회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평생 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몸담아 온 김상근(79) 목사에게도 남북 화해는 쉽지 않은 과제였다. 개인사부터 극복해야 했기 때문이다.

김 목사를 지난 2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빌딩에서 만났다. 그의 현재 직함은 한국방송공사(KBS) 이사장이다. 지난 1월 KBS 이사로 선임돼 이사장에 올랐고 지난달 초 3년 임기의 이사장에 재선임됐다. 김 목사는 이날도 KBS에 이사회를 주재하러 가는 길이었다. 김 목사는 평생 담아둔 마태복음 5장 23∼24절을 나직하게 암송했다.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는 이 말씀을 정말 오랫동안 붙들고 씨름했다고 한다. “아버지가 그렇게 당했는데, 주님 어떻게 먼저 북에 가서 화목하고 화해합니까, 고민이 깊었죠. 1990년 모친이 돌아가시고 난 후에야 북쪽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 사람들을 마주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40년 원한을 갖고 있다가 나와 똑같은 복수심 분노 원한, 이런 걸 품은 동시대인이 북쪽에도 있다는 걸 깨달았어요. 북쪽에서도 민간인 학살과 무차별 공중폭격이 있었으니까요.”

김 목사의 부친은 일제강점기 전북 군산에서 죽물공예품 수출을 한 자본가였다.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선 일제가 남긴 적산을 관리하는 부서의 책임자를 맡기도 했다. 기독교 신앙도 깊어 당시 일본 유학 중이던 무교회주의자 최태용 목사의 글을 철필로 긁어 등사해 배포하는 일도 했다. 북한이 밀고 내려온 뒤엔 당연히 반동분자 1순위로 몰렸고 수복 후 군산공원 자리에서 시신이 발견됐다. 부패가 진행돼 다른 매장지로 옮기지 못하고 그냥 그곳에 묻었다. 김 목사가 다닌 군산중고 맞은편이었다.

김 목사는 “학교가 끝나면 아버지 산소에 앉아 있다가 집에 오곤 했다”면서 “경제적으로도 힘들어 학창 시절은 늘 슬펐는데 낚시 같은 잡기에 몰입해 극복하려 했다”고 회고했다.

회심은 고2 겨울방학에 찾아왔다. 새벽기도마다 아들이 주님 품으로 돌아오길 기도한 어머니의 강권으로 부흥회에 참석했는데 신비로운 체험을 하게 된다.

“부흥회 둘째 날 창고를 개조한 교회의 문을 여니 더운 기운이 훅 하고 들어왔습니다. 신발을 벗은 것까지는 생각나는데 정신을 잃은 것 같아요. 깨어보니 장로님과 어머니 등 몇 분이 둘러앉아 기도해 주시고 저는 뭘 잘못했다고 막 울고 있고 옆에선 누군가가 제게 하나님 말씀을 들려주는 거예요. ‘상근아 상근아 내가 너를 얼마나 사랑하는데 너는 왜 나를 버리려 하느냐.’ 지금 보면 상투적인 말인데 그게 결정적 체험이었어요. 이후 생활 태도를 180도 바꾸어 교회 생활을 시작했죠.”

김 목사는 장공 김재준 목사의 글을 보고 한신대 진학을 결심했다. 전쟁으로 절망에 빠진 자신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들에게 기독교가 희망을 줄 수 있다는 확신이 섰다. 한신대 학장이었던 장공의 기독교 철학은 사회혁신론이었다. 1963년 한·일 회담 반대운동을 거치며 사회에 눈을 떴다.

김 목사는 “김재준 함석헌 한경직, 세 어른과 관계된 심부름을 시작했는데 박정희 체제 저항운동, 민주화와 인권운동도 심부름의 연속이었다”고 말했다. 서울 수도교회에서 문동환 목사의 강권으로 전도사 부목사 담임목사를 역임하며 15년을 보냈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총무와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일로 또 15년을 보냈다.

KBS 이사장으로 복귀한 김 목사는 정치권력과 자본의 횡포로부터 독립된 공영방송을 만들겠다고 다짐했다. 그는 “1980년대에는 NCCK에서 KBS 시청료 납부 거부운동을 주도한 외부자였다면 이젠 내부에서 방송의 독립성을 지켜야 하는 당사자”라고 말했다. 김 목사는 “우리 나이로 팔순인데 시편 90편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란 말씀이 자주 떠오른다”면서 “삶의 포괄적 유통기한이 있음을 늘 의식하고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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