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황의 카나리아들’ 보험 해약 카드론 증가 소주 소비량 증가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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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을 만하면 찾아온다. 언제 올지 몰라 불안하다. 오고 난 뒤에야 깨닫는다. ‘경제위기(economic crisis)’의 얄궂은 속성을 설명하는 말들이다.

매일 전 세계 경제연구기관들은 수많은 경기 예측 지표를 쏟아낸다. 내로라하는 경제학자들이 머리를 싸매고 흐름을 분석해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까지도 경제위기의 ‘선전포고’를 정확히 맞추는 지표는 없다. 경제학자들의 ‘불황 예언’은 대부분 빗나간다. 1930년대 대공황부터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까지 경제위기는 찾아올 때마다 깊은 상흔과 함께 “불황은 예측하기 어렵다”는 짧은 교훈만을 남겼다.

불황을 가늠할 수 있는 신호는 없을까. 20세기 초 영국의 광부들은 탄광에 들어갈 때마다 애완용 새인 카나리아를 데려갔다. 산소포화도에 민감한 카나리아가 노래를 멈추면 탄광 내 일산화탄소 농도가 심상치 않다는 징조였다. 광부들은 즉시 작업을 멈추고 탄광 밖으로 나왔다.

경제위기를 경고하는 ‘탄광 속의 카나리아’도 시대에 따라 변했다. 이 카나리아 가운데 일부는 시류를 타고 반짝 빛나다 사라졌지만, 다른 일부는 굳건히 살아남아 경제이론의 자리를 차지했다. 전대미문의 저금리·유동성 시대를 건너온 한국 경제를 진단하는 카나리아를 들여다봤다.

불황을 예고하는 ‘신호’

최근 경기 불황을 예고하는 카나리아로 보험 관련 지표들이 떠오르고 있다. 보험해약과 약관대출(보험료 담보 대출)의 증가는 전형적인 ‘불황 지표’로 꼽힌다.

보험은 만기 전에 계약을 깨면 가입자가 무조건 손해를 본다. 약관대출 이자율(연 6.4∼9.0%)도 은행권 대출 이자율보다 높다. 보험업계 관계자는 “그럼에도 보험에 손을 대는 건 그만큼 살림살이가 빠듯해졌다는 의미”라며 “은행 등 제1금융권에서 저축은행 등 제2금융권으로 넘어가기 직전에 보험에 손을 대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

금융감독원에 따르면 올해 1∼5월 25개 생명보험사가 내준 보험 해지환급금은 11조7145억원에 이른다. 지난해 같은 기간(9조5475억원)보다 22%가량 늘었다. 약관대출 액수는 올 상반기 60조8000억원(잔액 기준)으로 집계됐다. 전년 동기 대비 4조8000억원(8.7%) 증가했다.

카드론 이용자가 느는 것도 심상찮은 움직임이다. 급전이 필요하지만 은행 문턱을 넘기 어려운 저신용자가 고금리를 감수하고 찾는 대출이 카드론이다. 카드업계는 통상 카드론 이용액과 연체율이 동반 상승하면 불황의 징조로 본다. 금감원에 따르면 국내 7개 카드사의 올 상반기 카드론 이용액은 22조7000억원이었다. 전년 동기(19조5000억원)보다 16.4% 뛰었다. 카드론 연체율도 상승세로 전환됐다. 한국은행의 ‘금융안정보고서’를 보면 지난해 2분기(1.91%) 이후 하락세를 보였던 카드론 연체율이 올 1분기 1.96%로 반등했다. 은행권도 예·적금 해지율과 담보대출이 늘어나는 걸 불황의 시작으로 본다.

거시경제 측면에선 ‘장·단기 금리 간 스프레드(차이)’가 대표적이다. 통상 장기채권은 단기채권보다 금리가 높다. 단기채권은 기준금리 변화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 있지만 장기채권은 빠른 대응이 어렵다. 그런데 시장이 향후 경기 전망을 어둡게 보면 장기채권 금리가 단기채권보다 낮아지는 일이 벌어진다. 이 추세가 심화되면 장·단기 금리 스프레드가 ‘마이너스(-)’가 되는 역전 현상까지 벌어진다. 미국의 장·단기 금리 스프레드는 글로벌 금융위기 발발을 앞둔 2007년 12월 마이너스로 전환됐다. 주식과 부동산 시장이 뜨겁게 달아오르는 상황에서 홀로 경고음을 낸 것이다.

경기 예측 보완하는 ‘길거리 지표’

‘경기가 나빠지면 소주 소비량이 늘어난다.’ 지난 97년 외환위기 때 가장 주목받은 경제지표는 소주 판매량이었다. 직장을 잃은 사람들이 맥주 대신 상대적으로 값싼 소주를 더 찾는다는 이론이었다. 실제 98년 성인 1인당 소주 소비량은 26.4ℓ로 상승했다. 이듬 해 28.2ℓ까지 급증했다. 반면 96년(58.5ℓ)까지 줄곧 증가세를 보이던 맥주 평균 소비량은 98년 46.7ℓ로 고꾸라졌다. 맥주 판매는 경기가 나아진 2000년 50.8ℓ, 2002년 54.9ℓ로 조금씩 회복됐다. 반대로 소주 판매는 같은 시기 25.4ℓ, 24.6ℓ로 떨어졌다.

‘길거리 지표’의 원조는 미국이다. 대공황의 쓴맛을 본 미국은 공식적인 경제지표 외에도 평범한 이들의 일상을 분석해 경제 흐름을 읽으려 했다. ‘여성의 치마 길이를 보면 경기를 읽을 수 있다’는 말도 대공황 때 나왔다. 경기가 나쁠수록 저렴한 립스틱이 많이 팔린다는 ‘립스틱 효과’와 나란히 경제학 교과서에 실리는 ‘경제 격언’이 됐다.

저명한 경제학자들도 길거리 지표를 눈여겨봤다. 앨런 그린스펀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연준) 의장이 동네 세탁소를 기웃거리며 손님 수를 세고, 쓰레기 배출량을 눈여겨봤다는 건 유명한 일화다. 옷 세탁을 맡기는 사람이 늘고 가전제품 포장지 등 쓰레기가 증가하는 것은 경기가 좋아짐을 의미한다고 봤다.

다음 경제위기는 2020년?

글로벌 경제위기가 다시 올까. 온다면 언제쯤일까. 미국의 유력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이 지난 5월 경제학자 60명을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의 59%가 “2020년부터 미국에 불황이 시작된다”고 내다봤다. 원인으로는 62%가 “미 연준이 초래한 경제 과열”을 꼽았다. 2009년부터 시작된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긴 ‘양적완화(통화 확대) 정책’의 끝에 깊고 긴 불황이 기다리고 있다는 분석이다.

그러나 경제학에선 ‘예측 가능한 경제위기는 일어나지 않는다’는 격언도 있다. 세계 4대 회계법인 딜로이트의 경제학자 대니얼 바크먼은 WSJ 설문조사를 거부하며 이렇게 답했다. “경기 불황은 예상치 못한 충격에서 시작된다. (불황 예측에 대한) 의미 있는 답변이란 없다.”

양민철 박재찬 기자 liste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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