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역사여행] 왜 나를 살리셨을까 … 전도하는 농부되다

전도인 원경선과 서울 북한산

[한국기독역사여행] 왜 나를 살리셨을까 … 전도하는 농부되다 기사의 사진
원경선(1914∼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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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도인 원경선(1914∼2013). 화학비료와 농약을 쓰지 않고 자연의 힘만으로 농작물 키워 시장에 내놓은 사람. 한국 유기농법의 선구자이자 식품그룹 ‘풀무원’의 오늘이 있게 한 그리스도인이다. 세상 사람들은 그를 호미로 땅을 고르던 농부 어른으로 기억한다.

환경과 생명을 존중하는 삶을 살았던 원경선은 ‘인간상록수상’(1988) ‘인촌상’(1988) ‘녹색인상’(1992) ‘UNEP 글로벌500상’(1995) ‘국민훈장 동백장’(1997) 등을 수상했다.

그는 보통학교 졸업하던 해 아버지를 잃고 지독한 가난과 상실감에 휩싸였던 가난한 소년이었다. 아버지가 남겨준 유산이라곤 소 두 마리 값에 해당하는 40원의 빚뿐이었다. 배움이 모자랐던 소년이 할 수 있는 건 농사였다. 그러나 그 농사를 통해 더불어 사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줬다.

원경선은 세상이 요구하는 역경 극복의 영웅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을 충실히 산 신앙인일 뿐이다. 그는 열대여섯 나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영접하고 말씀을 따라 살기로 작정했다. 그리고 세상의 유혹과 핍박 가운데서도 오직 말씀을 붙잡고 버텼다. 넘어지고 깨어지고, 예수를 멀리하고 회개하면서도 바른길을 걷고자 했다. 이러한 원경선 삶의 철학을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정직’이다. 정직이 구원이라고 생각했다.

보통학교 졸업한 가난한 농군 아들

원경선이 태어난 평남 중화군 상원군 번동리는 갈 수 없는 땅이다. 그가 가난을 피해 새로 정착했던 황해도 수안군 읍내면 옥현리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수안에서 ‘교회’라는 신문명을 접하고 “그곳에 가면 무언가 새로운 것들을 접할 수 있는 호기심과 충족감 있었다”(생전 구술·이하)며 예배에 참석했다.

“그저 무언가 읽고 공부하는 마음으로 꾸준히 성경을 읽고 고단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기도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신앙의 길로 접어들었다.”

해방 전 상경한 그는 고단한 서울살이를 했고 ‘충격적 사건’을 겪은 후 중국 베이징으로 가서 외국인노동자가 되기도 했다. 6·25전쟁 후에는 농사를 통한 공동체 생활을 위해 경기도 부천과 양주 등에서 살았다.

원경선 삶을 이해하는 지점은 북한산이다. 서울 돈암동-아리랑고개-정릉-북한산성으로 이어지는 그의 북한산길은 바울의 다메섹 도상과 같은 하나님과의 대면 공간이다.

지난 추석 직후. 정릉 청수장을 지나 버스 종점에서 내려 북한산 산행을 시작했다. 정릉 계곡은 1970∼80년대 서울 시민이 즐겨 찾던 피서지였다. 초등학교 때 소풍을 가기도 했다. 당시 계곡을 차지했던 상가는 말끔히 정리돼 맑은 계곡이 자연 그대로 보존돼 있었다. 지금은 북한산국립공원 정릉지구다.

“하나님, 이 사람이 제 대신 죽었습니다. 만약 그날 제가 죽었다면 이 사람이 죽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이 몸은 하나님이 주인이십니다. 이 몸을 하나님께 바칩니다. 저를 당신의 뜻하신 바대로 쓰시고 거두어 주십시오.”

1938년 여름. 원경선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며 기도했다. 북한산 계곡, 즉 ‘골고다 죽음의 골짜기’를 벗어나고서였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나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눅 10:30)

원경선은 먹고살기 위해 북한산에 올랐다가 강도를 만났다. 그리고 자신 대신 그 강도들로부터 죽임을 당해 백골 시신이 된 소년이 있었다. 그해 여름을 떠들썩하게 했던 ‘정릉리 백골 사건’ 중심에 원경선이 있었다.

원경선은 1936년 황해도 수안을 떠나 상경해 우유배달을 하며 교회생활을 했다. 어려운 가운데서도 종로YMCA 야간 영어학교를 다니는 성실한 청년이었다. 이듬해 그는 서울 돈의동 플리머스 형제단 계열 교회에서 참한 지명희 자매를 만나 가정도 이뤘다. 부부는 전도자의 삶을 살겠다고 서약했다.

그는 결혼 전 교회 최병록 형제로부터 사진 기술을 배워 사진사가 됐다. 사진관 운영은 꿈도 꾸지 못하고, 사진기조차 빌려 잔칫집 등 기념사진을 찍는 출사로 돈을 벌어야 했다.

1938년 그 여름. 파고다공원(현 서울탑골공원)에서 무작정 고객을 기다리다 ‘동경 유학생’이라는 청년 2명을 만났다. 그들은 친구들과 북한산 소풍을 가겠다며 출사를 요구했다. 이튿날 원경선은 어머니 배웅을 받고 돈암동 전차 종점에 내려 그들을 만났다. 둘뿐이었다. 찜찜했으나 돈 벌 요량으로 아리랑고개를 지나 정릉골짜기로 접어들었다. 구슬비가 내렸고 안개가 자욱했다. 그들은 산행 끝에 북한산성 성문 어귀에 이르렀다. 지금의 보국문 대성문 대남문 중 하나일 것으로 추측된다. 그들은 깊은 숲으로 그를 유도했다.

“오늘은 숲의 안개 때문에 사진이 잘 안 나옵니다. 내일 다시 만나 찍어 드릴게요.”

간신히 그들과 헤어졌다. 이튿날 돈암동 전차역에 나갔을 때 그들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석 달 후 ‘정릉리 백골 사건’이 터졌다. 서울 도렴동 문화사진관 17세 소년 사진사가 전신에 돌을 맞아 백골이 되다시피 발견된 것이다. ‘유학생 사칭’ 두 사람이 범인이었고 그들은 형제였다. 당시 신문은 ‘당초 강도들은 원모(원경선) 사진사를 죽이려 하였으나 말끝에 원모가 외아들이라는 것을 알고 인면수심의 그들도 양심의 가책을 받아 살해를 단념하였다’고 보도했다. 그 시절 렌즈값은 소 두 마리 값이었다. 백골 시신 발견 후 범인들은 절도죄로 형무소에 있어 행방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원경선이 사건 보도 신문을 보고 경찰서를 찾아가 탐문 끝에 범인들을 잡을 수 있었다. 원경선 대신 강도 만난 사람은 ‘이웃’의 어린 소년이었다.

“그 순간 나를 지켜준 존재는 누구인가. 그분이 나에게 맡기신 일은 무엇인가 몇 번을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살면서 ‘강도 만난 자의 이웃 되는 사마리아인’이 되기로 결심했다.

‘정릉리 백골사건’과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어린 시절, 원경선은 보통학교 교사가 학비를 대신 내줘 그나마 졸업할 수 있었다. 훗날 “세상에, 그렇게 좋아보기는 처음이었어”라고 회상했다. 그는 졸업 후 모교를 찾아 농사지어 번 돈으로 학비를 반환했다. 교사들이 어안이 벙벙한 표정이었다고 한다. 일본인 교장은 그의 정직함을 학생들에게 훈화했다.

그렇게 정직하고 성실했던 원경선은 졸업 후 교장 추천으로 영농자금 혜택을 군청으로부터 받았다. 어느 날 주일에 군청에서 모범 영농 시찰을 나온다고 했다. “주일은 교회에 가야 해서 안 됩니다.” 그가 거절했지만 돼지 잡고 술 받아 놓으라는 압력이 계속됐다. 주일 예배를 보는 중 그들이 들이닥쳤다. 그들은 노발대발했고 소환장이 날아들었다. 군청 주사는 “조센징들은 근본 정신상태가 틀려먹었어. 천황폐하의 하늘과 같은 은혜를 도대체 뭐로 생각하는 거야”라고 몰아붙였다.

그는 짧게 답했다. “신앙에 위배되는 일로 나를 간섭하려 한다면 모든 것을 반환하고 내 길을 가겠습니다.” 황해도 수안 집을 떠난 이유였다.

서울 ‘강도 사건’ 후 원경선은 베이징으로 가 인서사(인쇄소)를 운영했다. 베이징행은 강도 사건의 충격을 잊고 싶은 이유도 있었다. 아내가 타이피스트 출신이었기에 사업이 가능했다.

베이징에서 해방 소식을 들은 그는 7년 만에 귀국했고 곧바로 토목건축 청부업에 뛰어들게 됐다. 영어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급격히 신앙심이 흐트러졌다. 군정 관계자들에게 뇌물을 주어야 공사를 딸 수 있는 것이 관행이었다.

“그리스도인이란 건 말 그대로 명목뿐이었어. 정신없이 타락했지. 양심의 가책도 나중에는 모르겠더라고. 그러다 결국….”

어느 날 미군 트럭 짐칸에 앉아 인천 부평 공사현장에 가는 길이었다. 오류동에 이르렀을 때 과속하던 차가 미끄러져 전복됐다. 또다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그는 양심을 찌르는 격심한 영혼의 통증을 느꼈다. “하나님 나 자신도 나를 사랑할 수 없습니다. 오로지 초자연 하나님만이 나를 사랑할 수 있습니다.” 1949년 그는 타락한 생활을 청산하고 다시 흙으로 돌아갔다. 경기도 부천군 도당리(현 부천시 도당동)에서 농사를 지으면서 고아를 돌보기 시작했다.

지난 주말 서울 경인로 고척스카이돔 앞 국도. 그가 교통사고로 두 번째 하나님 앞에 무릎 꿇은 다메섹 도상이다. “북한산 죽음의 고비를 넘기며 얻었던 깨달음과 약속, 그리고 이를 망각하고 저버렸던 죄 많고 보잘것없는 인간을 살려 주신 하나님….”

그의 간증과 기도가 귀에 들리는 듯했다.

그의 제자 유재현(전 경실련 사무총장)이 생전 원경선에게 물었다. “선생님은 자신의 직업이 뭐라고 생각하십니까.” 그가 주저 없이 답했다. “전도자입니다. 내 평생의 직업은 오로지 전도하는 농부올시다.”

▒ 풀무원과 원경선家
설립자일 뿐 경영에서 손 떼


최근 풀무원 계열사 풀무원푸드머스가 급식한 초콜릿케이크를 먹고 식중독 증상을 호소하는 사건이 있었다. 10여개 계열사를 둔 풀무원은 2조3000억원의 매출을 올리는 중견기업이다. 이 회사는 1981년 서울 강남에서 ‘풀무원 무공해 농산물 직판장’ 이름으로 시작됐다. 원경선의 아들 원혜영(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직판장 대표였다. 그는 아버지의 풀무원농장과 정농회 농부들이 기른 유기농산물을 팔았다. 이 직판장은 1984년 풀무원식품으로 이름을 바꾸면서 본격적으로 풀무원그룹이 시작됐다. 이때 합류한 사람이 원 의원의 고교동창 남승우씨다. 그는 1993년 경영권을 이어받았다. 현재 풀무원은 원 의원 또는 원씨가의 회사가 아니다. 원 의원이 경영권에서 손을 떼면서 지분을 받았기 때문이다. 풀무원그룹은 남 전 대표 이후 전문경영인 체제로 운영되고 있다.

글·사진=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jhjeon@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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