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남혁상] 미 중간선거 또 다른 관전법 기사의 사진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의 탐사보도전문기자 제이미 메이어와 질 에이브럼슨은 1990년대 초반 한 유명인사의 과거를 집요하게 파헤친다. 그 유명인사는 당시만 해도 흑인이 오르기 힘들었던 사법부 최고위직을 당당히 차지한 인물이다. 예일대 로스쿨 졸업, 정부위원회 위원장을 거쳐 연방항소법원 판사까지 화려한 이력을 지녔다. 뒤이어 흑인으로는 미국 역사상 두 번째로 연방대법원 대법관까지 올랐다. 무려 종신직이다.

그의 주변을 샅샅이 훑고 수십 명의 인터뷰를 한 끝에 두 사람은 이런 결론을 내렸다. 몇 년 전 그의 치부를 낱낱이 공개해 미국 사회를 논란의 장으로 몰아넣었던 한 여성의 고발과 증언은 진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었다. 두 사람은 심층 취재를 바탕으로 1994년 클래런스 토머스를 정면으로 다룬 책 ‘스트레인지 저스티스(strange justice)’를 펴냈다.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1991년 토머스를 연방대법관 후보자로 지명했다. 보수와 진보가 4대 4로 극명하게 갈린 대법관들 중에서 캐스팅보트를 쥔 인물로 보수 성향의 흑인 남성을 점찍은 것이다. 그런데 무난할 것으로 예상됐던 토머스의 인준 과정은 난관에 봉착했다. 과거 그와 함께 일했던 애니타 힐 오클라호마대 교수가 토머스의 지속적인 성추행과 성희롱을 폭로한 것이다. 토머스는 힐에게 끊임없이 데이트 요구를 하면서 입에 담기도 어려운 포르노 영화의 장면들을 계속 자세히 묘사했다고 한다. 힐은 상원 청문회에 증인으로 나서면서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논란이 커지자 흑인 여성 1600명은 돈을 모아 뉴욕타임스에 자신들 이름과 함께 힐을 지지하는 전면광고를 게재했다. 국민 상당수도 힐에게 힘을 보탰다. 곳곳에서 토머스 인준 반대 집회도 이어졌다.

하지만 상황은 이상하게 흘러갔다. 전원 남성인 상원 법사위원 14명은 청문회에서 구체적인 피해 사례를 반복 질문해 증인을 당혹케 했다. 토머스의 상원 인준 표결은 52대 48로 통과됐고, 많은 여성들은 좌절하고 분노했다.

27년이 지난 올해에도 비슷한 상황이 연출됐다. 예일대 로스쿨 출신에 연방항소법원 판사를 지낸 브렛 캐버노가 연방대법관 후보자로 지명된 이후 그의 고교 시절 성폭력 의혹을 한 여성이 고발한 것이다. 피해자 크리스틴 포드 팰로앨토대 교수가 청문회에서 과거의 끔찍한 경험을 생생히 증언했다. 그럼에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았다. 캐버노는 표결을 50대 48로 통과했다. 여성들은 다시 한번 좌절하고 분노했다.

1991년과 2018년의 여성 인권과 성폭력, 성희롱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제자리에 머물러 있었던 것일까. 그렇지 않다. 상황은 많이 변했다. 힐의 용기는 여성의 정치 참여 확대라는 사회적 요구로 이어졌고, 그 결과 이듬해 의회에 역대 가장 많은 여성이 진출하는 계기가 됐다. 27년 전 상원의원 100명 중 2명에 불과했던 여성은 다음 해 중간선거에서 6명으로, 현재는 23명까지 늘었다. 여성 하원의원 수도 폭발적으로 늘었다.

그동안 법조문 속에서만 존재하던 성희롱 문제는 사회적 논쟁의 이슈로 부각됐고, 남성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지지로 확산됐다. 흑인 여성 1600명의 전면광고는 올해 남성 1600명이 참여한 광고로 이어졌다. 광고 카피 역시 과거 ‘스스로를 지키자’는 소극적 문장에서 ‘우린 힐을 믿고, 포드도 믿는다’는 적극적인 문구로 바뀌었다.

더 큰 변화는 성폭력 피해자에 대한 인식을 여성 스스로가 바꾼 것이다. 과거의 성폭력 피해자가 ‘희생자(victim)’였다면, 여성들은 이제 상처를 극복하는 ‘생존자(survivor)’로 스스로를 정의한다. 미투 운동과 맞물린 트럼프의 성추문과 캐버노 파문은 몇 주 남은 중간선거에 어떤 영향을 미칠까. 여성 출마자가 역대 최다를 기록할 이번 중간선거에서 여풍(女風)이 얼마나 강력한 힘을 발휘할지 살펴보는 것도 또 다른 관전법일 듯하다.

남혁상 국제부장 hsnam@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