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이동훈] 나바로-로스 보고서의 위력 기사의 사진
도널드 트럼프 미국 정부의 무역전쟁은 상식 밖이다. 미국과 각 상대방국 의회가 수년을 검토한 끝에 가까스로 비준한 자유무역협정(FTA)을 멋대로 뜯어고치고, 관세 폭탄을 협박 도구로 휘두른다. 총만 안 들었을 뿐 구한말 대포를 쏘아대며 난징과 제물포 앞바다에서 개항을 요구하던 제국주의 국가들의 행태와 다를 게 없다. 쌍둥이 적자로 불리는 무역적자와 재정적자의 책임이 전부 중국을 비롯한 무역 파트너 국가들의 불법보조금, 환율조작, 덤핑 등 ‘사기 행각’에 있다며 압박하고 있는 형국이다.

트럼프 행정부의 무역전쟁이 앞으로 어떻게 전개될지 궁금해 트럼프가 2년 전인 2016년 9월 대선 후보 때 발표한 경제정책 보고서를 열어봤다. 보고서는 트럼프 무역전쟁의 선봉장으로 주목받고 있는 피터 나바로 백악관 무역제조업정책국장 겸 국가무역위원회(NTC) 초대 위원장이 윌버 로스 상무장관과 함께 작성했다. 하버드 대학 박사 출신인 나바로 위원장은 당시 캘리포니아 주립대학 어바인 캠퍼스 경제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트럼프 캠프 수석 경제고문으로 발탁됐다. 그는 정통 경제학자들 사이에 세계 100대 경제학자 리스트에도 끼지 못할 정도로 비주류로 통한다. 트럼프의 사위가 인터넷을 뒤져 그를 천거했다는 뒷담화까지 회자된다. 게다가 자유무역주의자였던 그가 2001년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한 중국이 불공정한 무역 관행을 통해 미국을 저성장에 몰아넣었다는 이유만으로 돌연 강성 보호무역주의자로 변신했다는 스토리는 이해불가다.

그런데 나바로에 대한 의구심은 31쪽 분량의 보고서를 읽어내려갈수록 점점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그가 제안한 사항들이 차근차근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한·미 FTA와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은 미국의 의도대로 개정 협상을 타결했다. 특히 보고서에 중국 일본 캐나다 독일(유럽연합) 멕시코 한국 등 6개국이 미국 무역적자의 절반을 차지해 이들을 압박해야 한다는 내용도 최근 가시화되고 있다. 며칠 전 로스 상무장관이 언론에 중국을 고립시키기 위해 이들 국가와 힘을 합쳐야 한다고 단언하고 나선 점은 이 보고서가 일종의 지침서 역할을 한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이런 상황이라면 보고서에 제시된 중국에 대한 환율조작국 지정은 정해진 수순이라는 생각이 든다.

또 한 가지 눈여겨볼 만한 것은 정책의 역발상이다. 앞으로는 인구구조적 변화 때문에 1990년대식 고성장과 일자리 창출은 기대할 수 없다는, 최근 취업자 급감에 대한 한국 정부의 변명과 유사한 버락 오바마 행정부의 이른바 ‘뉴 노멀’ 주장을 반박한 대목이 눈길을 끈다. 보고서는 특히 재정만 주물럭거리는 ‘케인스식 공장 논리’로는 성장을 꾀할 수 없다고 했다. 경기 불황과 대량실업을 막기 위해 적자재정을 꾀하는 경기부양책의 한계를 지적한 것이다.

보고서는 이보다는 성장률과 일자리 회복을 불공정한 무역 관행 시정에서 찾는다. 전후 1947년부터 2001년까지 미국 성장률은 연 3.5%를 유지했으나 중국이 WTO에 가입한 이후 1.9%로 떨어지고 일자리는 연간 200만개가량 잃어버렸다는 논리다. 따라서 세금 감면으로 구멍난 재정을 무역 부문 등에서 상쇄해 10년 후에는 균형재정을 달성할 수 있다는 계산을 한다. 중국 입장에서는 억울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미국인들 입장에선 ‘생큐’ 아닌가. 미국은 이미 세금 감면 등에 힘입어 연율 기준으로 지난 2분기 성장률 4.2%를 기록했고, 실업률은 완전고용을 의미하는 3.7%로 1969년 이후 49년 만에 최저치를 갈아치웠다.

한국의 올해 일자리 예산은 19조2000억원으로 역대 최고치다. 내년에는 22%나 더 늘어난 23조5000억원을 쏟아 붓겠다고 한다. 청년고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는데 ‘재정중독’이라는 타성에 젖어 일자리 예산과 지원 항목만 늘리는 건 아닌지. 자국민에게 손을 벌리지 않으려는 나바로의 발상이 한국에도 필요한 시점이다.

이동훈 경제부 선임기자 dhlee@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