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하나님의 정의 기사의 사진
마태복음 20장에 등장하는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인간이 말하는 정의와 하나님의 정의가 어떻게 다른지 자세히 묘사하고 있다. 어느 날 포도밭 주인이 이른 아침부터 일꾼을 고용해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하고 일을 시켰다. 그 주인은 오전 9시와 낮 12시 그리고 오후 3시와 5시에 다시 새로운 일꾼들을 불러들였다. 그리고는 저녁에 일당을 주는데 모두 똑같이 한 데나리온씩 주는 것이었다. 가장 먼저 일을 시작한 사람들이 불만을 터뜨렸다. 상식적으로는 당연한 것이었다.

하지만 포도밭 주인은 단호히 말한다. “친구여 네가 나와 한 데나리온의 약속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나중 온 이 사람에게 너와 같이 주는 것이 내 뜻이니라”(마태복음 20:13-14). 여기 ‘나중 온 이 사람에게(unto this last)’라는 구절은 영국의 경제학자 존 러스킨의 책 제목이 되었고,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무려 100년 앞서 성서에 기초한 자비의 경제를 이야기한 이 책은 변호사 간디를 마하트마 간디로 만들었다.

예수님 당시 일일 노동자들의 하루 품삯은 한 데나리온이었고, 그들은 1년에 200데나리온쯤 벌었다. 날마다 일거리가 있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 한 유대인 가정이 1년을 살기 위해 필요한 최소의 비용은 220데나리온 정도였다. 즉 그들은 하루 벌어 겨우 하루 이틀을 살았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께서 들려주신 ‘포도밭 주인의 비유’의 핵심은 몇 시간을 일했든 일한 사람 모두가 하루치의 온전한 품삯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게 ‘하나님의 정의’라는 것이다. 자본주의적 상식으로 보면 당연히 충격적이다. 하지만 하루 임금이 한 데나리온인 상황에서 “나중 온 이 사람”이 겨우 1시간 일했다고 그에게 12분의 1데나리온만 준다면 어찌 되겠는가. 인간의 눈에는 정의롭게 비칠지 몰라도 ‘모든’ 생명을 사랑으로 지으시고 돌보시는 하나님 눈에는 잔혹하다.

성서의 ‘포도밭 주인의 비유’는 진정한 경제의 정의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경제활동의 목적은 부의 축적이 아니라 생명의 유지다. 경제는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약자다. 세상을 경영하고 백성을 구제하는 것이 경제다. 그래서 경제적 정의는 모든 사람을 사람답게 살게 하는 것이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품위와 존엄성을 유지하게 하는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의 정의다. 인간이 되신(성육신하신) 하나님이 가르치는 정의다. 이 정의는 사랑에 기초한 정의다. 가난한 자들에 대한 연민에 기초한 정의다. 이렇듯 사랑과 정의는 성서 안에서 하나다. 신의 정의와 신의 사랑은 동전의 양면이다.

기독교의 정의는 ‘적극적 정의’다. 가난한 자들의 생명과 생존을 우선적으로 고려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성서의 정의관은 ‘모든 인간은 동등하다’는 신념에서 나왔다. 사상사적으로 만인이 동등하다는 생각의 원천은 바로 기독교의 성서다. 물론 경험적으로 볼 때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말은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주위를 돌아보면 인간은 저마다 여러 능력의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그럼에도 모든 인간이 동등하다는 것이 인간에 대한 성서의 일관된 관점이다. 모든 인간이 다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이다.(창세기 1:27)

추운 겨울이 오고 있다. 폭염과 혹한이 쌍둥이 같다고 하니 111년 만의 불볕더위를 경험한 올해의 겨울이 걱정이다. 성서는 끊임없이 가난한 자들과 힘없는 자들을 돌보고 그들의 권익을 옹호하라고 가르친다. 땅에는 언제나 가난한 자들이 있겠지만 하나님이 주신 땅과 성읍에서는 가난한 자가 없도록 돌보고 구제하라고 명한다.(신명기 15:4-11) 밭에서 곡식을 베거나 포도원에서 열매를 거둘 때에도 반드시 나그네와 고아와 과부를 위해 일부를 남겨두라고 가르친다. 그러면 하나님이 복을 내리시겠다고 약속한다.(신명기 24:19, 시편 146:7-9) 만물이 무르익는 이 계절, 우리 민족도 그런 하늘의 복을 받는 지혜로운 민족이 되기를 소망한다.

장윤재 이화여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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