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사초롱-원재훈] 심신미약사회 기사의 사진
우리의 심신을 지배하는 감정들 중에서 분노는 갈등의 원인이면서도, 동시에 갈등 해결의 한 방법이 된다. 참으로 역설적인 감정이다. 분노가 사라진 사회는 평화로울 것 같지만 그 사회를 병들게도 한다. 부조리하고, 불합리한 일에 대한 분노는 예수님이 성전 안에서 장사치들을 내쫓아버린 분노를 생각나게 한다. ‘분노하라’고 분노한 사상가 스테판 에셀이 공감하고, 행동해서, 세상을 바꾸라는 메시지가 생각난다. 세상을 바꾸기 위해서는 우리들의 사소한 분노가 밑거름이 된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요즘 우리 집 거실에 모인 식구들은 분노하고 있다. PC방 살인사건 살인자가 또 우울증약을 복용하는 심신미약자라서 감형받을 수도 있다는 가능성에 대한 분노이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많은 국민들은 분노를 한다. 왜 그럴까. 아직 법 집행이 되지도 않았는데 왜 우리는 서둘러 분노하고 행동하는 것일까.

우선 인권에 대한 생각이 서로 달라서이다. 성실하고 착하다고 판단되는 순수한 청년이 어처구니없는 갑질에 시달리다가 잔혹하게 살해당했다는 사실은 힘겨워도 정직하고 착하게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의 마음에도 칼질을 한 것이다. 그 청년의 일이 바로 내 일이 될 수 있다는 공포감과, 그런 일에 대해서도 요리조리 빠져나갈 허술한 법망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인권을 위해 만들어놓은 정상참작과 감형이유에 대한 불안감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사항은 어쩔 수 없고, 불쌍한 사람들의 범죄에 대한 인간적인 배려에서 기인한다. 그런데 이걸 악용하는 듯한 느낌이 들어서 불안한 것이다. 결국 내 몸은 국가와 법이 아닌 내가 지켜야 하는 것인가?

그런데 살해당한 사람의 인권과 살인자의 인권이 과연 평등한 것일까. 범죄자들은 우울증약을 복용하건 안 하건 간에 모조리 심신미약자들이다. 건강한 사람이 어떻게 멀쩡한 사람을 죽이고, 때리고, 사기치고, 강간하고, 기만한단 말인가. 그래서 사람들은 일단 살인과 같은 모든 범죄에 대해 분노하고 예외 없이 강력한 처벌을 원하면서 행동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이 분노의 개인적인 복수를 막기 위해 국가의 형벌제도가 존재한다.

형벌의 역사를 보면 개인의 분노를 국가와 법이 다스리는 역사이기도 하다. 고대 중국에서는 아버지를 죽인 범인은, 그 아들이 6개월 이내에 범인을 찾아서 똑같이 복수하면 죄를 묻지 않는다는 법이 있었다. 개인의 원한이 너무 크면 그 사회가 무너지기 때문이다. 살인자는 어떤 경우이건 간에 용서받을 수 없는데, 거기에도 법망을 피해가는 맹점이 있다는 사실에 분노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사례를 수없이 보아 왔다. 사람이 아니라, 사회가 심신미약이다. 머리가 복잡해진다.

인권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모든 인간에게 적용돼야 하는 것이지만, 그것을 악용하는 인간에게도 적용해야 하는 것인가. 필리핀 두테르테 대통령이 마약사범들을 무자비하게 살해하겠다고 하고, ‘그들의 인권 따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고 했는데 과연 이것은 인권에 대한 탄압인가. 물론 손쉽게 그렇다, 그것은 인권탄압이라고 비난할 수는 있겠지만 말이다. 현실적으로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우리는 상식이 통하는 건강한 사회를 꿈꾼다. 심신미약환자가 많은 사회는 당연히 심신미약사회이다. 형벌의 존재이유는 범죄를 예방하는 백신 기능 때문이다. 다양한 질병에 맞는 백신의 다양한 개발이 시급하다. 이 글의 결론이 쉽지 않다. 이유는 나 역시 심신이 미약하기 때문이다. 여러 가지 일상사에서 다가오는 스트레스와 갈등으로 우울한 마음이 불안하고, 이번 주에 치과 치료를 받아야 하는 몸이 아프기 때문이다. 치료약도 꾸준히 복용한다. 그래서 마음과 몸, 즉 심신이 미약하다. 이런 현상은 우리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하지만 우리는 중범죄를 저지르지는 않는다. 사회가 개인 인권을 보호하고, 건강하게 유지되기 위해서는 엄정한 법 집행이 필요한 순간이 있다. 예수님이 성전의 장사치를 쫓아내듯 말이다. 그때를 놓치면 더 거칠고 무서운 사회가 될 것이다.

원재훈 시인·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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