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박세환] 공부밖에 할 게 없었어요 기사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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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3 담임은 모의고사가 끝나면 교단에 서서 점수를 불렀다. “500! 490! 480…” 요란하게 가채점 결과를 조사했다. 당시 반 1등은 매번 480∼490점에서 주뼛대며 손을 들었다. 호명하는 점수가 내려갈 때마다 숨이 턱 막혔다. 450점에도 손을 못 들면 담임은 불특정다수를 지목하며 “그래서 대학 가겠느냐”고 힐난했다. 당시 교실은 점수가 지배했다. 입시는 퍽 공정한 기준처럼 보였고, 우리는 복종했다. 일단 대학만 가고 보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었다. 버텨야 한다는 오기도 있었던 것 같다.

대학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작정 외우는 과목이 태반이다. 시험 족보가 횡행하고, 줄을 세워 학점을 매긴다. 활발한 토론과 지식의 장을 기대했던 대다수는 실망한다. 그들은 취업을 준비하며 또 한 번 당황한다. 기업이 원하는 건 창의적 인재다. ‘새로운 의견을 생각하여 낸다’는 창의(創意)의 본래 뜻과 맞는 인재인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렇다.

입사 자기소개서는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경험을 묻는다. ‘대학 조별 과제에서 팀원 간 의견 차이가 있었지만 원만히 해결했다’는 재미없는 지원자를 비난할 순 없다. 그게 진짜인 걸 어찌하나. 세계 여행을 떠나 알프스에서 길을 잃었다든지 하는 경험은 아무나 못한다. 시간과 돈이 있어야 한다. 좋은 스펙에 남다른 경험까지 요구하는 기업의 지나친 욕심이다. 훌륭한 인성을 지닌 인재 육성보다 취업을 최종 목표로 삼는 한국 교육이 그 왜곡된 역할마저 제대로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숙명여고 시험지 유출 사건을 보며 새삼 왜 우리는 이리도 교육에 집착할까 궁금해졌다. 교육은 가장 확실한 신분상승의 수단이다.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못한 21세기가 서글프긴 하지만 교육이야말로 지위 점프의 지름길이다. 그러니 막노동을 하다 서울대에 수석 합격한 뒤 ‘공부가 가장 쉬웠어요’라는 책을 냈던 A씨의 사례가 두고두고 회자되는 것이다(변호사가 된 A씨는 지난해 개인회생 브로커에게 명의를 빌려준 혐의로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교육 이외 합법적인 성공 루트가 전무한 현실이 교육을 괴물로 만들었다.

남들 다 하니 따라 하는 경우도 많다. 최근 목동의 한 카페에 들렀는데 옆 테이블에서 엄마들끼리 토론이 한창이었다. 한 엄마가 “과외 교사가 서울대 출신인데 불성실하다”고 하자 다른 엄마가 “차라리 성실한 고려대가 낫다. 돈도 좀 더 싸다”고 맞장구를 쳤다. 이렇게 나눈 소중한 정보를 통해 자녀의 교육 방향이 수시로 수정될 것이다. 딱히 이유는 없다. 옆집 순이 엄마가 그룹과외를 시킨다니 하는 것이다. 조바심이 과잉 교육을 부채질한다. ‘할아버지의 재력, 아빠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라는 훈육 지론은 그래서 위험하다. 부모와 자녀 모두를 옭아맨다.

교육의 혜택을 누린 이들의 내로남불은 교육을 더 왜곡한다. 두 자녀를 외고에 보내고 뒤늦게 외고 폐지를 발표한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의 해명은 기가 막히다. 과거에는 고교 서열화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었는데, 지금은 교육 개혁의 굳은 신념이 생겼다는 거다.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의 대학 서열을 타파해야 한다는 교수와 전문가 대부분은 저 열개 대학 중 한 곳이나 외국대학을 나왔다. 열등감 폭발이라는 비판을 피할 수는 있겠지만, 참 이기적인 처사 아닌가. 그렇게 경쟁심, 분노, 위기감은 교육을 욕망의 복마전으로 만들고 있다.

숙명여고와 같은 전통의 여학교가 시험지 유출로 무너지는 모습은 참담하다. 문재인 대통령의 부인 김정숙 여사와 조현옥 청와대 인사수석뿐 아니라 최초의 여기자 최은희와 첫 여성 변호사 이태영을 길러낸 학교다. 교훈은 ‘밝고 다습고 씩씩하게 나라를 사랑하자, 민족을 사랑하자’다. 고교 교훈치곤 무겁다. 그만큼 인재를 길러 나라에 이바지하겠다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100년이 넘은 학교가 더 이상 욕망에 휘청대지 않도록 철저히 수사해주기 바란다.

다만 학생부종합전형을 폐지하고, 수시 비중을 줄이고, 수능 위주의 정시를 늘린다고 교육 비리가 사라지거나 교육 정의가 바로 서진 않을 것이다. 학벌 사회도 영원할 테고, 과외와 학원을 아무리 단속해도 사교육은 더욱 기승을 부릴 것이다. 교육에 딸린 밥줄과 입은 욕망을 먹고 자란다. 그러니 정부가 대입제도 개편과 수능과목 재편에만 몰두할 때가 아니다. 시민사회와 합심해 교육을 제외한 성공 가능 분야를 발굴할 때다. 운동선수·연예인 아니면 공부밖에 할 게 없는 우리 아이들이 불쌍하지도 않은가.

박세환 정치부 기자 foryou@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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