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1> 유교 전통 엄격했던 고향서 싹튼 신앙

‘땡그렁…’ 종소리 이끌려 교회로… 어린 나이에 복음의 맛 깨달아

[역경의 열매] 손인웅 <1> 유교 전통 엄격했던 고향서 싹튼 신앙 기사의 사진
손인웅 목사가 지난 19일 서울 성북구 덕수노인복지센터 앞에서 손을 흔들며 환하게 웃고 있다. 이 노인복지센터는 손 목사가 덕수교회 담임목사로 시무하던 2007년 설립했다.
일생 목사로 살았다. 교인들을 목양하는 틈틈이 ‘교회가 교회다워지는 일’을 위해 힘썼다. 갈라진 교회를 하나로 묶기 위해 눈물의 기도를 했고 소외된 이웃을 돌보기 위해 구슬땀을 흘렸다. 2012년 전도사 때부터 42년 동안 섬기던 서울 덕수교회를 은퇴했지만 여전히 난 현역이다. 최근엔 한국자원봉사협의회 상임대표가 됐다. 우리나라의 자원봉사자들을 늘리고 수준을 높이는 걸 고민하는 자리다. 일할 수 있음에 늘 감사한다.

돌아보면 순식간에 지나간 인생이다. 나의 살던 고향은 경북 군위군 효령면 내리동이다. 매봉산 자락 중 하나인 안산을 병풍 삼아 100가정이 모여 살던 그림 같은 시골마을이었다. 농사 짓는 주민들이 서로를 의지해 사는 화목한 향리였다. 당시 군위엔 사과 과수원이 많았다. 지금이야 기후변화로 사과 산지가 북쪽으로 이동했지만 내가 어릴 때 우리 마을은 말 그대로 ‘동구 밖 과수원 길’이 펼쳐져 있었다. 내리동은 임진왜란 때 경주에서 이곳으로 피난 온 ‘경주 손씨’들이 모여 사는 집성촌이어서 유교 전통이 강했다. 우리 부모님도 마찬가지셨다. 아버지는 문중의 어른이셨다. 인자하셨지만 엄격하셨다. 나는 9남매 중 여섯째였다. 집안의 제사를 직접 드려야 할 위치는 아니었어도 늘 제사를 드리는 문화 속에 살았다.

인생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잡히게 된 건 우연한 일 때문이었다. “땡그렁, 땡그렁…” 어느 날 갑자기 종소리가 들렸다. 1948년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형님, 종소리 어디서 나는지 아십니꺼?” “모린다.” 무뚝뚝한 경상도 사나이들의 대화치고는 길었다. 직접 찾아나서는 수밖에. 언제 다시 울리나 기다렸는데 그날은 울리지 않았다. 이튿날 새벽을 노렸다. 아직 어둠이 남아있던 시간, 종이 울렸다. 안산이었다. ‘그래 그 언덕 위에 교회가 있는데 거기 같다. 가보자.’ 후다닥 뛰어나와 어둠에 잠긴 마을을 달리기 시작했다. 누가 가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냥 왠지 가고 싶었던 게 전부였다. 도착해보니 ‘내리교회’라는 간판이 붙어있었다. 어디서 용기가 났는지 교회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강대상에서 기도회를 준비하던 분이 날 쳐다봤다. “어서 오니라. 내리동 사는가보구나.” 나중에 그분이 전도사님이란 걸 알았다. 한쪽 다리가 불편하셨지만 늘 부지런하셨다. 가난한 시골교회를 섬기다보니 스스로 생계도 꾸려야 하셨다. 염소를 길러 장에 파셨던 기억이 아련히 난다. 종소리가 나를 교회로 불렀지만 신앙 안에 날 살게 하신 분은 전도사님이셨다. 아이들을 앉혀 놓고 성경 이야기를 너무 실감나게 해 주셨다. 턱을 괴고 성경 이야기에 빠져들던 기억이 사무치게 그립다. 찬송가도 가르쳐 주셨다. 초등학교 말고는 무얼 배울 곳이 없던 시골에서 난 새 세상을 맛봤다. 행복했다.

늘 교회 종소리가 날 교회로 이끌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 종소리가 우리 마을을 채우고도 넘쳐 멀리 중리동과 불호동까지 은은하게 퍼졌던 것 같다. 그 마을에서도 이끌리듯 우리 교회에 나온 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린 나이에 이미 복음의 맛을 온 몸으로 깨닫다니, 주님께 감사할 뿐이다. 다만 문제가 있었다. 쳐다보기도 무서웠던 아버지였다. 아버지를 넘어야 그 뒤에서 날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약력=1942년 경북 안동 출생. 경북대 사범대 및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 졸업, 미국 매코믹신학교 신학박사. 덕수교회 담임목사, 한국기독교목회자협의회 대표회장, 한국교회봉사단 이사장 역임. 현 세계결핵제로운동본부 회장, 서울시자원봉사센터 이사장, 한국자원봉사협의회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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