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2> 한국전쟁 때 피난 가서도 교회 폭격 맞을까 걱정

학교는 불탔지만 교회는 무사해 안도, 초등 4학년 때 부흥회서 성령 체험

[역경의 열매] 손인웅 <2> 한국전쟁 때 피난 가서도 교회 폭격 맞을까 걱정 기사의 사진
손인웅 목사(왼쪽)가 1957년 고등학교에 입학한 직후 찍은 사진. 손 목사는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고향을 떠나 대구에서 유학 생활을 했다.
주님은 어느 곳에서도 역사하신다. 우연히 찾아온 교회 종소리가 그랬다. 그건 주님이 내게 주신 ‘자연계시’였다. 강력한 계기로 주님을 만났지만 아버지 앞에만 서면 작아졌다. 어머니는 내가 교회에 다니는 걸 아셨다.

“인웅아, 교회 나가지 마래이” “가고 싶습니더. 재미있고요” “아이고, 내는 모른데이. 아부지 아시면 클난다.”

아버지의 눈을 피하기 위해 꾀도 냈다. 수시로 드리는 제사 때 아버지는 늘 맨 앞에 서셨다. 그 뒤로 문중 어른들과 형님들이 섰다. 난 여섯째 아닌가. 내 자리는 그야말로 하단 말석이었다. 동생들이 내 뒤에 있었지만 철저히 입단속을 시켰다. 그리고 절을 할 때 조용히 두 손을 모으고 기도했다. 그 모습을 보며 발을 동동 구르셨던 어머니께는 지금도 죄송하다. 물론 초등학교 1학년의 꾀로 아버지의 눈을 계속 가릴 수는 없었다. 엄격했지만 인자했던 아버지가 매를 들었다.

“이 녀석, 바지를 걷어라” “아부지, 잘못 했심더” “교회 나가지 마라 캤나, 안 캤나” “아부지, 그건….”

형님들과 누님, 아우들이 다 보는 앞에서 회초리가 종아리에 감겼다. 물론 그때뿐이었다. 아버지에게 혼날 때마다 교회와 더 가까워졌다. 하루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혼비백산이 돼 짐을 싸기 시작하셨다. 남쪽으로 간다고 하셨다. 전쟁이 난 것이었다. 마을도 뒤숭숭했다. 모두가 피난을 떠났다. 우리 가족은 3개월 동안 남쪽으로 몸을 피했다. 전쟁이 났어도 형제들과는 즐거웠다. 산과 들을 뛰어 노는 게 그저 좋을 나이였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엔 내리교회가 떠나질 않았다. “교회가 폭격을 맞으면 우짜노.” 먼 곳에서 교회를 위해 기도했다. 고향에 돌아오자마자 안산 언덕을 향해 뛰었다. 멀리서 보이는 교회가 무사했다. 폭격을 피한 것이었다. 빈 마을을 지킨 교회는 피난길에서 돌아오는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다.

초등학교는 불에 타 사라졌다. 가마니 학교가 시작됐다. “하나님 감사합니데이. 교회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데이.” 기도가 절로 나왔다. 1951년 여름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됐다. 교회에 여자 전도사님이 오셔서 부흥회를 인도하셨다. 당시엔 철야집회가 일상적이었다. 자정이 지나도록 손뼉을 치며 찬송을 부르다 성령체험을 했다. 강대상 천장에서 불덩어리가 떨어지더니 그게 입으로 쑥 들어오는 게 아닌가. 옆에선 이슬이 내리고 백합 향기가 진동했다. 불덩어리가 가슴속에서 타오르는 바람에 뜨거워 견딜 수 없어 밖으로 뛰어나갔다. 이리저리 뛰다 교회 앞에 있던 작은 소나무를 붙들고 기도를 시작했다. 세월이 지나도 그 경험이 너무나 소중하다. 무엇보다 10세 어린이도 뜨거운 성령체험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다. 참 놀라운 일이었다. 하나님의 택하심을 확신하며 요셉과 같은 꿈을 갖는 계기가 됐다.

많은 간증거리가 내리교회에서 생겨났다. 연도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날 키가 크고 눈이 파란 선교사님이 자동차를 몰고 교회에 오셨다. 온 동네 사람들이 서양 사람을 구경한다고 교회로 몰려들었다.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세월이 많이 흐른 뒤 그 분이 구의령(William Grubb) 선교사란 사실을 알게 됐다. 초등학교 시절 만났던 구 선교사님, 그분이 훗날 경북대 사범대에 다닐 때 나의 후견인이 돼 주신 것은 주님이 맺어주신 소중한 만남이었다. 내리교회에서 싹튼 신앙은 대구로 이어졌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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