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3> “중학교 못 보낸다” 부모님 말에 지게 부수고 가출

“주님, 길을 열어 주이소” 늘 기도… 면사무소 중학교 과정서 공부 기회

[역경의 열매] 손인웅 <3> “중학교 못 보낸다” 부모님 말에 지게 부수고 가출 기사의 사진
손인웅 목사(뒷줄 오른쪽 여덟 번째)가 대구서중학교에 재학 중이던 1956년 10월 23일 경주로 수학여행을 떠나 첨성대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결국 대구에서의 삶이 시작됐지만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게를 부수고 가출했던 혁명적 사건이 인생의 변곡점이 됐다. 1954년 효령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부모님은 고민에 빠지셨다. 어려운 형편에 자식들 모두를 중학교에 보낼 수 없어 한 해씩 번갈아가며 진학을 시키고 있던 터였다. 내가 쉬어야할 차례가 됐다. “얘야. 1년만 농사일 도우래이. 중학교는 내년에 가래이.” 하늘이 무너지는 말씀이셨다.

친구들이 입학시험을 치른 날에 난 밤새 울었다. 6년 동안 개근에 우등상을 받고 수석으로 졸업한 나였다. 그런 내가 중학교 진학시험에 응시도 못하고 농사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는 날 위해 지게를 만들어 주셨다. “안산에 올라가 땔감을 구해 오니라.” 친구들이 군위중학교 교복을 입고 내 곁을 지나갈 때면 부끄러워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안산에 올라 우두커니 있다가 지게를 부수기 시작했다. 무슨 생각이 있어서 한 일은 아니었다. 박살을 내 버렸다.

그리고 가출을 했다. 돌아보면 내 삶에 있어 출애굽과 같은 사건이었다. 모범생으로 자라온 내가 아버지가 만들어 준 지게를 부숴 버리고 가출하다니. 그 길로 난 높은 산을 넘어 20리 길을 걸어 구미 장천면에 있던 천우고아원엘 찾아갔다.

“제가 일을 잘합니더. 열심히 일할 테니 밥만 먹여 주심 됩니더. 저녁에만 공부하게 해 주심 정말 감사하겠심더.” 원장에게 눈물로 호소했다. 하지만 원장은 단호했다. 부모가 있는 아이를 받아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집으로 돌아가라고 했다. 밤중에 왔던 길을 따라 다시 걸었다. 비참했다. 동네와 가까워져서야 얼마나 큰 일이 벌어진 건지 알게 됐다. 동네가 발칵 뒤집혔다. 아버지 생각을 하니 겁이 덜컥 났다. 단단히 각오했다. 그런데 웬 일인가.

“이리 오니라. 미안하데이. 내년에 꼭 중학교 보내 줄 테니 1년만 기다려 달래이.” 내게 간청하셨다. “아부지. 안됩니더. 전 공부하고 싶어 견딜 수가 없습니더.” 눈물에 묻힌 말이 좁은 방을 갈랐다. 하지만 가난한 현실을 눈물만으로 극복할 수는 없었다. 아버지는 그날 밤 다시 지게를 만드셨다. 난 소년 나무꾼으로 돌아갔다.

늘 기도했던 기억이 난다. “주님. 뜻이 있는 곳에 길이 있다 하셨심더. 길을 열어 주이소.” 4월의 어느 날이었다. 기쁜 소식이 들렸다. 효령면사무소에 중등과정을 교육하는 학교가 신설됐는데 장차 중학교 학력을 인정받을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소식이었다. 부모님도 우선 그곳에서 공부하다 정규 중학교로 전학할 길을 찾아보자고 하셨다. 정식 중학교는 아니었어도 중학교 과정이었다. 난 그곳에서 영어와 수학을 공부하며 학구열을 불태웠다.

지게를 부쉈던 사건이 인생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혁명적 사건이 됐다. 내 삶의 출애굽 사건이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이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 아니겠는가. 면사무소에서 시작한 공부가 발판이 돼 훗날 대구로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 대구에선 대구서중학교(현 협성경복중학교)에 입학했다. 공부는 즐거웠다. 교복도 멋있었다. 친구들과도 늘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내리동이 그리워졌다. 사실 그리웠던 건 내리교회였다. 아련했던 기억이 점점 뚜렷해졌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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