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4>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자 신앙 친구들이 기도로 붙잡아

객지서 홀로 지내니 고향 교회 그리워 대구 달서교회에 등록하고 의지

[역경의 열매] 손인웅 <4>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자 신앙 친구들이 기도로 붙잡아 기사의 사진
손인웅 목사가 신앙생활을 시작했던 경북 군위군 효령면 내리교회의 옛 모습. 교회는 1983년 개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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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게를 때려 부수고 가출한 것만 생각하면 오싹하다. 대구에서 중학교를 다닌 매 순간이 감사함으로 가득했다. 공부도 재미있었다. 기적과도 같은 순간을 살고 있다고 항상 생각했다. 하지만 감사함과 동시에 외로움도 커졌다. 어린 중학생이 부모님의 곁을 떠나 객지에서 산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마음엔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그리움이 자라났다. ‘와 이리 헛헛하노.’ 그리움의 근원을 따라가니 그 끝에 내리교회가 있었다. 내 신앙의 모판, 바로 그곳이었다. 눈을 감으면 안산 중턱에 있던 교회의 모습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너무나 따뜻했던 교회 어른들이 보고 싶었다. 그중에서도 손달근 영수님이 가장 보고 싶었다. ‘영수’(領袖)는 미조직교회에서 교회를 인도하던 임시직분을 말한다.

영수님은 내리교회를 설립하신 분이었다. 일찌감치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던 영수님은 유교가 지배하던 마을에서 많은 어려움을 당하다 마을을 떠나셨다. 어쩔 수 없이 길을 떠난 영수님은 옆 마을에서 신앙생활을 하다 극심하게 반대하던 문중 어른이 돌아가신 뒤에야 고향에 돌아올 수 있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예배공동체를 만든 것이었다. 장소는 사랑방이었다. 이 모임이 훗날 내리교회가 됐다. 객지에서 이분이 그리워진 건 결국 신앙생활에 대한 갈급함 때문이었다. 지금도 교향교회인 내리교회를 늘 생각한다. 내 신앙의 고향이기 때문에 잊을 수 없는 곳이다. 안타까운 건 고향교회가 여전히 미자립 상태라는 사실이다. 50년 가까이 고향교회를 후원하고 있다. 자립하지 못한 고향교회를 멀리서 지켜보는 마음이 편하질 않다. 늘 마음으로 운다. 더 많은 이에게 복음의 종소리를 전하게 해 달라고 항상 기도한다.

대구에서의 생활도 그럭저럭 적응해 갔다. 고향만 그리워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대구에서도 신앙생활을 해야 했다. 외출복도 따로 없어 검은색 교복을 입고는 시간이 날 때마다 집주변을 정탐하며 교회를 찾아 다녔다. 그러다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산동 쪽으로 가는 길에 있던 교회가 눈길을 끌었다. 바로 달서교회였다. 교회에 등록했다. 중학교 3학년이 되니 유석준 목사님이 부임하셨다. 참 인자하신 분이었다. 훗날 아내(유인주 사모)를 만나 결혼한 뒤에야 알게 됐다. 유 목사님이 아내의 작은아버지란 사실을. 하나님이 이끌어 주시는 삶의 여정에선 이 같은 극적인 만남이 많다. 주님이 내 삶의 인도자이시자 설계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확신한다. 우연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서울 청운교회 이필산 담임목사가 아내와 사촌지간이다. 게다가 이 목사의 부인이 내 딸 세라와 대학 동창이기도 하다.

하지만 중학교 3학년이 됐을 때 난 주변의 ‘노는 아이들’과 어울리기 시작했다. 자칫 그 길로 빠질 뻔했다. 아예 주님과 멀어질 수도 있었던 그 순간 달서교회 신앙의 친구들이 날 기도로 붙잡아줬다. “인웅아. 교회에서 한 발짝도 못 나간데이. 기도하자. 니가 있을 곳은 바로 교회인기라.” 그 친구들이 없었다면 난 거리를 헤매다 그저 그런 인생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모두 주님의 돌보심이었다. 결국 신앙 안에서 무사히 중학교를 마치고 1957년 대구서고등학교에 진학했다. 눈물겨운 사연이 날 그 학교로 이끌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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