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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경의 열매] 손인웅 <5> 고교 입학 후 2년 넘도록 신문배달로 학비 벌어

가난한 부모님 짐이 되지 않겠다고 다짐… 법대 진학 원했는데 담임은 사범대 권유

[역경의 열매] 손인웅 <5> 고교 입학 후 2년 넘도록 신문배달로 학비 벌어 기사의 사진
1960년대 대구와 인근 마을 사이를 연결하던 버스의 모습. 손인웅 목사도 이 같은 버스를 타고 효령면의 고향집을 오갔다.
내가 다녔던 대구서고등학교는 지금은 사라졌다. 당시에도 명문 고등학교는 아니었다. 단지 학비가 쌌다. 이 학교로 진학한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고등학교 진학을 앞두고 큰 결단을 한 일이 있었다.

1956년 11월로 기억된다. 중학교 졸업을 앞둔 시점이었다. 집안 형편이 지게를 부수던 3년 전이나 별반 나아지지 않았다. 효령면의 고향집을 찾았다. 대구와 효령면을 잇는 시외버스가 있어서 다니는 길은 어렵지 않았다. 버스로 한 시간 남짓이면 도착하는 거리였다. 집에 가는 길이 멀지 않았기 때문에 몸은 힘들지 않았다. 다만 마음이 편하질 않았다. 가난한 부모님을 지켜보는 게 힘들어서다. 그래서인지 주말에만 잠깐 들렀다가 바로 돌아오곤 했다. 그날도 내리교회에서 예배를 드린 뒤 일찌감치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아부지, 저 대구로 돌아갈랍니다.” “같이 가재이.” 작별인사를 하면 늘 아버지가 나보다 먼저 버스정류장으로 향했다. 어깨엔 어김없이 쌀 두 말이 든 가마니가 들려 있었다. 집에 들렀다 돌아갈 때면 항상 아버지가 챙겨주시던 ‘선물’이었다. 굶지는 말라는 간절한 바람이 담겨 있던 눈물겨운 선물이었다.

늘 반복되는 장면이었다. 하지만 그날따라 아버지의 어깨가 좁아보였다.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됐다. “쌀을 모은다고 얼매나 힘드셨을꼬. 고등학교는 아부지에게 절대 짐이 되지 않을 거래이.” 그런 다짐을 했다. 스스로 진학하겠다고 결심한 것이었다.

원래 가고 싶었던 학교는 따로 있었다. 대구 계성고였다. 미션스쿨이었고 명문이었다. 하지만 사립학교로 학비가 비쌌다. 꿈만 꿨지 현실적으론 너무 멀었다. 손에 잡히지 않았다. 내 힘으론 절대 갈 수 없었다. 그래서 생각한 곳이 바로 대구서고였다. 다니던 중학교와 같은 재단이라 익숙하기도 했다. 야간 과정이 있어서 여차하면 오전에 일을 할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학비가 쌌다. 그땐 젊었다. 뭐든지 할 수 있었다.

고등학교에 입학해 2년이 넘도록 신문배달을 했다. 모두가 자고 있을 새벽 4시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추워도, 비나 눈이 내려도 어김없이 기상시간은 그때였다. 힘들지 않았다. 오히려 내 힘으로 학비를 번다는 생각에 자랑스러웠다. 신문배달은 속도가 생명이었다. 지국에서 신문을 받으면 그때부턴 뛰었다. 2시간 가까이 신문을 돌렸다.

처음엔 신문을 품에 안고 뛰어다녔던 기억이 생생하다. 1년쯤 지났을까. 지국에서 자전거를 한 대 내줬다. 내 몸에 비해 큰 대형 자전거였지만 신문을 받아 페달을 밟기 시작하면 불어오는 바람이 늘 시원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하루에 300부 정도 돌렸던 것 같다. 신문을 다 돌리면 비 오듯 땀이 쏟아졌다. 고단한 일상이었지만 한스럽지 않았다. 오히려 보람이 컸다. 내 손으로 돈을 벌어 공부를 하고 있다는 자부심 덕분이었다.

공부는 적성에 맞았다. 국어와 영어, 수학이 다 재미있었다. 나중엔 역사에 푹 빠져 역사교사를 꿈꾼 적도 있었다. 주요과목을 다 잘했으니 대학은 자신 있었다. 법대를 목표로 뒀다. 하루는 진학상담을 했는데 담임선생님은 생각이 달랐다. “인웅아, 니는 경북대 사범대에 가래이. 명문인 기라. 졸업하면 바로 교사 발령도 받을 수 있대이.”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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