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6> 아버지, 소 판 돈으로 “대학 등록금 내래이”

혁명의 해 1960년 경북대 사범대 입학, 시위하며 자율치안 활동… 정신없이 지내

[역경의 열매] 손인웅 <6> 아버지, 소 판 돈으로 “대학 등록금 내래이” 기사의 사진
경북고 학생들이 1960년 2월 28일 대구 시내를 행진하며 “학생들을 정치의 도구로 사용하지 말라”고 외치고 있다.
법대에 가서 사법고시를 보고 싶었다. 하지만 담임선생님의 권유는 큰 도전이 됐다. 경북대 사범대의 명성은 대단했다. 졸업하면 모두 교사로 발령 받았다. 가난한 부모님께 경제적으로 도움을 드릴 수도 있었다. 무엇보다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 컸다. 진학 상담을 마친 뒤 발길을 북구에 있는 경북대로 돌렸다. 사범대는 대학 본관 오른쪽에 있었다. 단과대 중 가장 오래됐다. 여의도 국회의사당처럼 생긴 대학 본관이 너무 멋있었다.

사범대 국어교육과를 새로운 목표로 삼았다. 목표가 생기니 공부가 수월해졌다. 신문배달을 하느라 새벽부터 뛴 덕분에 건강도 좋았다. 피곤할 법도 했지만 전혀 그렇지 않았다. 새벽까지 공부하다 바로 일어나 신문을 돌리는 생활이 반복됐다. 아침에 일찍 일어난 덕분에 하루가 무척 길었다. 건강한 삶의 습관이었다. 당시는 대학들마다 시험문제를 직접 출제했다. 시험을 치르는 날이 하루하루 다가왔다. 그날이 다가올수록 웬일인지 담담해졌다. 자신이 있었다. 시험 결과는 좋았다. 합격이었다.

꿈에도 그리던 경북대 사범대 학생이 된 것이었다. 입학 전 아버지가 불러 고향엘 갔다. “인웅아. 대학 등록금 내래이.” 신문지로 싼 벽돌만한 덩어리 안엔 돈이 들어 있었다. 어디서 이런 큰돈이 났을까 생각하다 항상 보이던 황소 생각이 났다. 아버지가 소를 팔아 등록금을 마련한 것이었다. 눈물이 났다. 아버지의 큰사랑에 감동했다. 조용히 아버지의 손을 맞잡았다.

대학에 들어가면서 교회를 대봉교회로 옮겼다. 이 교회는 1948년 설립된 교회로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을 지낸 이상근 목사님이 사역하시던 교회였다. 하지만 당시는 혼란스럽던 때였다. 나는 60학번이다. 그 시절을 살았던 사람들은 ‘60학번’이 뭘 의미하는지 금방 이해한다.

1960년은 혁명의 해였다. 발원지가 대구였다. 대학 입학을 목전에 두고 있던 그해 2월 28일, 대구 경북고 학생 800여명이 결의문을 낭독한 뒤 거리로 뛰쳐나왔다. “횃불을 밝혀라, 동방의 별들아”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이승만 정권에 대한 반발이 표출된 것이었다.

이날 시위는 4·19혁명의 기폭제가 됐다. 첫 시위는 고등학생들이 시작했지만 곧바로 대학생들이 시위를 이끌었다. 혁명의 기운을 온 몸으로 받아냈다. 늘 공부를 하고 싶었던 나였지만 세월은 그렇질 못했다. 입학과 동시에 시위에 참여했다. 사실 앞장섰다. 거리에서 맞기도 많이 맞았다. 하지만 굴하지 않고 연일 시위대의 맨 앞에 섰다. 3월 15일 ‘3·15 부정선거’가 터졌다. 불난 집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모든 권위에 대한 도전이 일어났다. 캠퍼스에선 총장 물러가라는 구호가 나왔다. 학생과 직장인들이 뒤섞인 시위대는 경찰서에 불을 질렀다. 도지사도 사의를 발표했다. 행정과 치안이 마비된 대구는 대학생들이 지켰다. 자율치안이 시작된 것이었다. 나도 원대동에 있는 한 파출소에 배치됐다. 거리질서와 교통질서 유지에 투입됐다. 시위에 참여하랴, 자율치안대 활동하랴 공부할 새가 없었다. 지금 돌아보면 정신을 놓고 살던 시절이었다. 신앙생활도 소홀해졌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날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 시절 난 죽음을 경험했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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