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굴! 이 사람]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습니다”

독립 위해 헌신했던 김마리아 선생의 불꽃 같던 삶

[발굴! 이 사람]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습니다” 기사의 사진
김마리아 선생의 모습. 독립을 위해 일생을 바친 김 선생은 1944년 3월 13일 고문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 제공
“나는 대한의 독립과 결혼했습니다.” 여성 독립운동가 김마리아 선생(1892∼1944)이 남긴 말이다. 일생 독신으로 지내며 독립만 바라던 그는 독립을 위해 궂은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그의 삶은 저항과 투쟁, 쉬지 않는 공부와 후학 양성, 투옥과 고문으로 대변된다. 일본 경찰에 검거돼 구속되고 모진 고문을 받을 때마다 그는 나라 살리기에 더욱 깊이 참여했다. 그는 여성들이 독립운동의 주역이 돼야 한다고 독려했던 운동가이기도 했다. “우리 국민의 반은 여성입니다. 그런데 왜 독립의 문제를 남성에게만 맡겨 둡니까. 안 됩니다. 여성들이 독립의 주역이 됩시다. 우리가 독립을 위해 헌신해야 합니다.” 김 선생은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마다 붙잡고 이 말을 했다.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그의 흔적은 곳곳에 남아 있다. 1919년 2월 8일 일본 도쿄의 유학생들이 했던 ‘2·8독립선언’에도 참여했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당시 발표됐던 독립선언서를 직접 들고 국내로 들어왔다. 이는 3·1운동의 기폭제가 됐다.

이 일로 구속된 김마리아는 가석방되자마자 일제 강점기 최대 여성 비밀 항일단체인 ‘대한민국애국부인회’를 조직했다. 부인회는 전국적으로 독립자금을 모아 중국 상하이에 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전달하기로 했다. 하지만 본격적인 활동을 펼치기 전인 1919년 11월 조직이 발각되면서 지도부 전원이 구속됐다. ‘김마리아 사건’으로 불리는 이 일로 3년형을 선고받은 김 선생은 고문 후유증으로 일생 고통을 당한다.

이후 중국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건너간 김 선생은 컬럼비아대와 뉴욕신학교 등에서 공부한 뒤 귀국, 원산 마르다윌슨신학교에서 후학을 양성했다. 이때 그는 여전도회 전국연합회도 조직해 대대적인 신사참배 반대 운동을 이끌었다. ‘독립의 잔다르크’라는 별명도 가졌던 그는 1944년 3월 13일 53세를 일기로 짧은 생을 마감한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최근 ㈔김마리아선생기념사업회(회장 이미자)를 중심으로 훈격(勳格)을 ‘대한민국장’으로 높여야 한다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기념사업회는 지난 18일부터 훈격 상승을 위한 1만명 서명운동도 시작했다. 이미자 회장은 1일 “김 선생은 독립을 위해 쉬지 않고 투쟁했고 공부했으며 여성들을 깨우치기 위해 눈물로 노력하셨던 분이었다”며 “고문 후유증으로 큰 고통 속에 있으면서도 세계 각지를 다니며 독립의 열정을 불살랐던 분”이라고 했다.

현재 여성 독립운동가의 서훈 비율은 남성과 비교하면 2% 수준에 머물러 있다. 가장 높은 훈장인 대한민국장을 받은 여성도 대만 장제스 총통의 아내였던 쑹메이링 여사가 유일하다. 외국인이지만 독립군에 자금을 지원했다는 공을 인정받았다.

이 회장은 “1962년 훈장을 받을 때는 국내 활동내용만 평가 대상이었는데 사실 김 선생은 중국 상하이와 미국, 일본에서의 활동도 대단했다”면서 “훈격을 높여 여성 독립운동가의 공을 제대로 치하해야 한다”고 말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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