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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포커스-봉영식] ‘말의 함정’에 빠진 운전자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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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펜실베이니아 대학교 스타 강의 교수이자 협상학의 대가 스튜어트 다이아몬드 교수는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저서 ‘어떻게 원하는 것을 얻는가’에서 협상의 열두 가지 핵심 전략 중 하나로 ‘상대방이 따르는 표준을 활용하라’고 주문한다. 상대방이 과거에 했던 발언이나 고수했던 방식을 상기시키면서 전례가 있는 일인데도 이를 수용하기 거부하면 그 모순을 공격하라는 조언이다.

‘콰이어트: 시끄러운 세상에서 조용히 세상을 움직이는 힘’의 저자로 유명한 수전 케인도 비슷한 조언을 한다. 하버드 법대를 졸업하고 협상기법 전문 변호사로 일한 경험이 있는 그는 내향적인 성격이 치열한 협상에서 장점이 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협상에서 말을 많이 할수록 상대방은 나의 협상 목표를 더 분명히 읽어낼 수 있을 것이고, 나의 의도와 내가 가진 정보가 그대로 드러나게 된다. 협상테이블에서 한 말이 나중에 발목을 잡는 낭패는 피하는 게 좋다.

문재인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이 동력 소진 조짐을 보이고 있다. 지난 2년간 문재인정부의 대북 정책과 레토릭이 한국 외교의 발목을 잡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한반도 운전자론의 가장 중요한 자산은 주변 국가들의 신뢰다. 신뢰의 핵심은 일관됨이다. 그러나 이 정부는 대북 관련 발언에서 일관성을 잃으면서 한반도 운전자로서의 입지마저 흔들리고 있다. 예를 들어 존 볼턴 백악관 안보보좌관은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에서 문 대통령에게 1년 내 비핵화를 약속했고, 미국 정부는 이를 한국 정부를 통해 전달받았음을 몇 차례 강조했다. 북한 정권이 올해 말까지 미국 정부가 인정할 수준의 가시적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다면 북한뿐만 아니라 한국 정부까지 신뢰를 잃게 된다.

문 대통령은 취임 후 두 차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한반도 비핵화와 평화 정착에 유엔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2017년에 문 대통령이 말한 유엔의 역할과 2018년에 주문한 유엔의 역할은 정반대였다. 2017년 제72차 유엔총회에서 문 대통령은 “나는 유엔 안보리가 유례없이 신속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만장일치로, 이전의 결의보다 훨씬 더 강력한 내용으로 대북 제재를 결의한 것을 높이 평가합니다…. 나는 북한이 타국을 적대하는 정책을 버리고 핵무기를 검증 가능하게, 그리고 불가역적으로 포기할 것을 촉구합니다. 모든 나라들이 안보리 결의를 철저하게 이행해야 (합니다).”

그러나 올해 9월 26일 제73차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문 대통령은 국제사회에 정반대 메시지를 던졌다. “북한은 우리의 바람과 요구에 화답했습니다…. 이제 국제사회가 북한의 새로운 선택과 노력에 화답할 차례”라고 이야기하면서 대북 제재 완화 필요성을 역설했다. 이에 대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프랑스와 영국은 북한이 아직 구체적이고 확실한 비핵화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아셈 의장 성명은 북한이 완전한 비핵화 공약을 이행하고 핵확산금지조약 및 국제원자력기구 안전 조치에 조속히 복귀할 것을 촉구했다. 미 국무부는 “문 대통령 스스로 남북 관계 개선은 북한의 핵 프로그램 문제 해결 없이 별도로 진행될 수 없다고 했다”는 표현을 쓰면서 대북 제재 조기 완화는 없을 것임을 확실히 했다.

지난여름 북한산 석탄 국내 수입 문제가 터졌을 때 조현 외교부 차관은 한국 정부의 북한 석탄 수사 장기화는 법치국가로서 무죄추정 원칙 하에서 사실관계를 철저히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북한 비핵화 조치에 대해 한국 정부가 같은 수준으로 철저한 사실관계 확인 노력을 하고 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한국 정부는 한·미 간 빛 샐 틈도 없다고 거듭 강조한다. 그렇다면 왜 양국 정부는 비핵화, 대북 제재, 남북 협력 관련 한·미 협의를 체계화하고 공식화할 워킹그룹을 11월 중 출범하기로 결정했는지 궁금하다.

봉영식 연세대 통일연구원전문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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