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제민] 정책 의지만큼이나 역량을 기사의 사진
정부의 포용적 성장 기조는 전 정권들도 내세웠고 세계적으로도 대세
그러나 제대로 시행된 경우가 없는 점이 문제
그래서 정책의 실행 역량을 먼저 갖추는 게 중요해


지난 1일 문재인 대통령은 국회 시정연설에서 기존 경제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고 밝혔다. 당연한 일이다. 혁신성장,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라는 정책 기조는 새로운 것이 아니다. 지난 20여년 동안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모든 정권이 비슷한 정책 기조를 내세웠다. 이명박정부가 처음 2년간 ‘적하(滴下)효과’를 내세운 정도가 예외였지만 그 후 동반성장을 강조하는 쪽으로 돌아섰다. 이것은 세계적으로 봐도 마찬가지다. 최근 10여년간 ‘포용적 성장’이 세계적 대세가 되었는데, 그 내용은 현 정부의 정책 기조와 별 차이가 없다.

혁신성장, 소득주도성장, 공정경제는 서로 밀접한 관계가 있다. 혁신성장은 소득주도성장과 모순되지 않는다. 소득주도성장의 내용은 분배를 개선하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이다. 분배가 평등해야 가난한 가정에 태어났기 때문에 기업가나 과학기술자가 될 수 있는 사람의 재능이 사장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혁신성장의 주체는 기업인데, 기업은 실패하는 경우도 많다. 실패하더라도 뒤를 받쳐주는 사회안전망이 있어야 적극적으로 기업 활동을 할 수 있다. 공정거래가 이뤄져야 중소·벤처기업이 대기업으로 자라서 혁신이 활성화된다. 공정거래는 분배를 개선해 내수 진작으로 성장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문제는 정책 기조를 잘 정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실행 역량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우선 소득주도성장의 ‘작명’이 잘못됐다. 분배를 개선하면 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 것은 논란을 자초했다. 내용이 옳더라도 국민에게 전달하는 방법도 생각해야 했다.

경제에 충격이 가해지는 데 대해서도 고려가 부족했다. 최저임금 인상이나 노동시간 단축이 그런 경우다. 결과를 놓고 해석이 분분하지만 복잡하게 얽힌 경제에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는 만큼 처음부터 충격을 줄이는 쪽으로 정책을 써야 했다. 그것은 1997년 외환위기가 주는 최대 교훈이다. 외환위기 전 한국 경제는 온갖 문제에도 불구하고 ‘형평을 수반한 성장’을 하고 있었지만, 외환위기 후 충격요법을 쓴 결과 성장률은 떨어지고 분배는 나빠졌다.

최저임금의 대안으로 거론되는 근로장려세제는 실수령액을 같이 맞춰 주면서도 충격을 줄이는 효과가 있다. 지난 20여년간 최저임금과 근로장려세제를 조합하는 것이 일종의 세계 표준이 됐다. 한국은 영세기업이 많아 더 근로장려세제를 쓸 필요가 있다. 더욱이 근로장려세제는 현 정부 전신이라 할 수 있는 노무현정부 때 만든 것이다. 그런데도 정부는 처음에는 최저임금과 근로장려세제를 조합한다는 개념이 없었다.

노동시간 단축도 그렇다. 충격을 줄이기 위해 1년에 2∼3시간씩 줄여나가는 방식도 있다. 대기업이나 공공부문에 먼저 적용한다고 해서 충격이 없는 것은 아니다. 노동시간 단축이 일자리를 늘릴 것으로 기대하기도 쉽지 않다. 기업은 신규 채용을, 노동자는 임금 삭감을 꺼리는 상황에서 노동시간 단축이 자동적으로 일자리를 늘릴지는 불분명하다. 이 문제는 사회협약을 통해 푸는 것이 바람직할 터인데, 사회협약이 진척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냥 노동시간을 줄이는 것이 적절한지 의문이다.

그런 한편 정부가 중요한 개혁에 손을 안 댄 경우도 있다. 재벌 개혁이 그렇다. 공정거래위원회는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거버넌스 개혁이다. 거버넌스 개혁을 위해서는 상법을 고쳐야 한다. 이 문제는 결국 청와대가 나서야 할 터인데, 재벌 개혁의 선봉장을 책임자로 세운 청와대에서 1년 반 동안 그런 노력이 실종됐다. 재벌만큼이나 중요한 부동산 문제도 원칙에 의거하기보다 주택가격 폭등을 잡기 위해 사후 땜질식으로 다루어졌다.

정책 담당자 사이의 불협화음도 물론 문제다. 투톱 간 불협화음은 혁신성장은 누구, 소득주도성장은 누구 하는 식 평가가 나오게 만들었다. 경제의 성과가 나빠진 데 대해 국민들 눈에는 ‘내부자’인 정책 당국자들이 제3자처럼 논평하는 모습도 보였다.

현 정부가 정책 기조를 유지하려는 의지가 강한 것은 좋은 일이다. 지난 20여년간 모든 정부가 비슷한 정책 기조를 내세웠지만 제대로 시행이 안 된 데는 실행 의지가 약한 것이 원인이 된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경제정책은 의지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실행 역량을 갖추는 것이 더 중요하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적으로도 포용적 성장이 실제로 시행되는 경우는 드물다. 정부가 포용적 성장에서 성과를 낸다면 국내뿐 아니라 세계적 성공 사례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정책의 실행 역량을 먼저 갖춰야 한다.

이제민 연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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