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전정희] 공동의 정의 폭력 기사의 사진
개인은 공동의 폭력에 대항할 수 없다. 정치철학자로 공공성의 문제를 탐구한 한나 아렌트의 통찰이다. 거제 폐지 여성 살인사건, 춘천 연인 살인사건, 서울 강서 PC방 살인사건 등의 가해자는 개인이었다. 이들은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폭력을 행사해 살인을 저지른 혐의를 받고 있다.

그 불의한 가해자들에게 ‘공동의 폭력’이 폭력을 행사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들은 결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고유의 힘을 가진 개인은 공동의 폭력이 무서워 스스로의 폭력을 포기한다. 우리는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권력을 만들어내고 그 권력을 통해 개개의 폭력을 누른다. 이때 권력의 소유는 정의의 폭력을 위탁받은 자가 위임자의 동의를 얻어내야 가능하다. 따라서 개개의 폭력자는 결코 권력을 쥘 수가 없다.

성폭행 성추행 등의 폭력. 개인에게 가해진 ‘폭력’이 초점이 되어야 하는데 공동체는 이상하게도 ‘성’을 부각한다. 따라서 폭력이라는 원인 파악이 느슨해지거나 묻히고 만다. 이를테면 “피해자가 야한 옷을 입었다”는 가해자의 주장에 공동체가 격분하지 않는 것과 같은 심리다. 2008년 8세 어린이를 강간한 ‘조두순 사건’을 두고 피해 아동의 이름을 붙여 보도했다. 대개의 성폭력 사건이 가해자 이름보다 ‘○○녀’ 등과 같이 피해자의 여성성을 유독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성범죄자들은 기운 없고 소심한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한다. 이 얘기는 곧 성폭력 범죄자들이 자신에게 가해질 공동의 폭력이 성에 쏠려 있어 상대적으로 자신의 행위에 분노하지 않는다는 것을 체득했다고 봐야 한다.

우리는 폭력에 대항하기 위해 서로의 힘을 모은다. 그리고 이를 정의의 이름으로 ‘공동의 폭력화’하고 정치원리에 맡긴다. 이른바 권력의 탄생이다. 이 메커니즘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사회는 원시 야만과 다를 바 없다. 요즘 범죄자에 대한 판결이 야만을 부추긴다. 국민 체감 형량은 살인자가 기껏해야 20여년, 성폭력범이 몇 개월 또는 1∼2년형이다. 범죄자들이 술을 마셔 심신미약 상태였다거나 우울증과 조현병이 있다고 강변한다면 더 낮아질 수도 있다. 이런 사법제도 아래서 누가 공동의 힘을 무서워하겠는가.

법의 제정은 권력의 제정이라고 했다. 국회 등 위탁받은 권력이 일을 너무 안 한다. 수명 60∼70세 기준의 형량이 100세 시대에 맞겠는가. 출소한 살인자 등 범죄자들이 공동의 폭력을 형성하게 생겼다.

전정희 논설위원 겸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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