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11> ‘신학교 진학’ 선언에 아버지 뜻밖에 “그래라”

그 뒤로 부모님 내리교회 나가기 시작… 큰 사랑 속에 1964년 장신대 입학

[역경의 열매] 손인웅 <11> ‘신학교 진학’ 선언에 아버지 뜻밖에 “그래라” 기사의 사진
손인웅 목사가 학사모를 쓰고 있다. 손 목사는 1964년 2월 경북대학교를 졸업한 뒤 신학교에 입학했다.
목사로 서원기도를 한 뒤엔 외길뿐이다. 절대 진로를 바꾸면 안 된다. 그때나 지금이나 서원기도는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난 내가 한 서원기도의 의미를 반복해 생각했다. 생각할수록 확신이 들었다. 함께 서원했던 신앙의 동료들도 큰 힘이 됐다.

하지만 고향 마을엔 내가 국어교사가 되길 학수고대하시는 부모님이 계셨다. 생각만 해도 죄송한 마음뿐이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도무지 답을 찾지 못했다. 대학 졸업반이던 1963년 가을은 고민과 번뇌 속에 흘러갔다. 학교는 서울 광진구에 있는 장로회신학대로 정했다. 신학교 진학을 알리는 걸 더 이상 늦출 수는 없었다. 노회 추천서도 받아야 했고 준비해야 할 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대구 시내에서 버스를 타고 효령면으로 향했다. 버스 안에서 뭐라 말씀을 드릴지 수십 번 연습해 봤다. 그럴수록 마음이 답답해졌다. 미안해서였다.

인사를 드리자마자 말을 꺼냈다. “아부지, 죄송합니더.” 정적이 흘렀다. “저 목사 되는 학교에 가고 싶어예. 이미 하나님과 약속해서 바꿀 수도 없심더. 허락해 주이소.” 그리고는 눈을 질끈 감았다. “그래라. 정 하고 싶으면 해야제. 이왕 할라 카면 열심히 하그래이.” 의외였다. 너무도 쉽게 허락을 해 주셨다. 이 말을 하시고는 마당으로 나가셨다. 허락은 하셨어도 아들에 대한 기대가 무너지는 기분이셨을 것이다. 그때 마음먹었다. 좋은 목사가 되겠다고, 절대 내 욕심 차리는 목사가 되지 않겠다고, 복음만 전하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내가 폭탄선언을 한 뒤 부모님께서는 내리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셨다. 어머니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례도 받으셨다. 날 울렸던 종소리를 따라 새벽기도에도 나가셨다. 그 시절을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난다. 부모님의 크나큰 사랑은 가늠할 수가 없다. 세월이 많이 흘러 임종을 앞둔 아버지는 문중 어른 중 한 분이신 손재명 장로님의 간곡한 기도와 권면으로 신앙고백을 확실히 하시고 하나님 품에 안기셨다. 유교식 장례도 거절하시고 기독교식으로 해 달라고 유언도 하셨다. 바다와 같은 사랑 속에 난 신학의 길에 들어섰다.

대학 선교단체에서 활동하며 야학교사로 봉사한 게 큰 도움이 됐다. 그 시절엔 교사 수급이 쉽질 않아 사범대 출신들은 일정기간 발령받은 학교에서 교사로 활동해야 했다. 난 그럴 마음이 전혀 없었다. 바로 신학을 시작하고 싶었다. 의무봉사기간을 야학교사 활동으로 대체할 수 있었다. 봉사활동을 열심히 한 덕이었다.



광나루(장로회신학대의 별칭)에 입학한 건 1964년 3월의 일이었다. 당시 장신대 신학대학원은 ‘학사원’ 1기를 뽑았다. 학사원은 학사 출신 입학생을 말했다. 그 전엔 지방 성서신학원 출신과 대학을 졸업한 학사들을 함께 뽑았다. 우리 때부터 분리됐다. 서울 안동교회 원로인 유경재 목사나 장신대 총장을 지낸 서정운 박사가 입학 동기다. 지금은 세상을 떠난 박정식(전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장) 김동익(전 새문안교회 담임) 목사도 졸업 동기로 광나루에서 함께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고민했던 동역자들이었다. 친구들과는 지금도 즐겁게 교류한다. 물론 신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는 감사와 감동의 사연들이 많았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