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12> 아버지 또 소 팔아 신학교 등록금 주셔 눈물

예의 갖추느라 갓 쓰고 교회 간 아버지 부흥사가 ‘실내서 모자 벗으라’해 충격

[역경의 열매] 손인웅 <12> 아버지 또 소 팔아 신학교 등록금 주셔 눈물 기사의 사진
손인웅 목사가 장로회신학대 신학대학원에 입학했던 1964년 쯤의 장신대 캠퍼스 전경. 장로회신학대 제공
경북 군위에서 태어나 대구에서만 살던 사람이 서울 생활을 시작하려니 생각만 해도 기분이 좋아졌다. 하지만 입학시험을 보고나니 설렘보다 걱정이 커졌다. 당장 등록금이 없었다. 가정교사를 하면서 모아둔 돈이 있긴 했다. 하지만 선교단체 활동을 하면서 이리저리 지출이 컸다. 한때 몸이 아파 병원비로도 많이 썼다. 사실상 빈털터리였다.

하루는 아버지로부터 전보가 왔다. 집으로 오라는 것이었다. “인웅아. 학교가 서울에 있다고. 등록금은 마련했나.” “아직…”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답을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가 어머니에게 “그거 가져오소”라고 했다. 신문지로 싼 벽돌 크기의 덩어리였다. “등록금에 보태라.” 아버지는 또 소를 파셨다. 대학 들어갈 때도 소를 팔아 등록금을 주셨던 아버지였다. 눈물이 앞을 가렸다.

아버지가 주신 돈으로 무사히 등록금을 냈다. 좋은 목사가 되기 위해 성실하게 훈련 받겠노라고 다짐에 다짐을 거듭했다. 지금이야 장로회신학대 주변이 번화해졌지만 그땐 그야말로 수도원 같았다. 나지막한 언덕에 있는 학교에선 멀리 한강 줄기가 훤히 보였다. 학교 뒷산인 아차산은 예나 지금이나 아름다웠다. 가난했던 신학생들은 시간이 날 때마다 산에 올라 산책을 했다. 밤에는 기도를 하러 올라가곤 했다. 신학교 생활의 백미는 같은 길을 걷기로 서원한 동료들과 함께하는 것이었다. 전국 각지에서 신학도를 꿈꾸며 대학생활을 마친 동료들은 그야말로 든든한 우군이었다.

더 감사한 건 아버지가 교회에 나가기 시작하신 것이다. 어머니처럼 열심히 나가시지는 않으셨다. 그래도 그토록 완고하게 반대했던 아버지께서 가끔이라도 교회에 나가신다는 소식은 큰 기쁨이었다. 그러다 어머니가 놀라운 소식을 전하셨다. 아버지가 교회에 갔다가 망신을 당하셨단 이야기였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이제 겨우 교회를 나가시기 시작한 아버지가 큰 상처를 받았을 것 같아서였다. 내용은 이랬다. 어느 날 내리교회에 부흥사가 오셨고 주민들이 삼삼오오 교회로 모여들었다. 아버지도 어머니와 함께 부흥회에 참석하기로 하고 가장 깨끗한 옷을 꺼내셨다. 문중의 어른이셨던 아버지는 늘 예법을 강조하셨다. 그날도 의관을 정제하셨다. 갓도 쓰셨다. 이 갓이 문제가 됐다. 그토록 예의를 갖춰 예배당에 들어가 앉으셨는데 갑자기 부흥사가 “실내에선 모자를 벗어야 한다”고 말한 것이었다.

듣고 있는데 얼굴이 화끈거렸다. 아버지는 교회에 손님이 오셔서 말씀을 전하신다고 최대한의 예를 갖춰 옷을 입고 가셨던 것이었다. 큰맘 먹고 교회에 나가셨는데 대뜸 그런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아버지가 받았을 충격이 얼마나 컸을지 가늠이 되질 않았다.













이튿날 아침 아버지가 이런 말씀을 하셨다고 했다. “야소교 믿는 사람들이 예법을 모린다.” 이날 이후 아버지는 한동안 교회 근처도 가지 않으셨다. 그래도 어머니가 신앙생활을 하시는 건 막지 않으셨다. 늘 그리워하셨던 것 같다.

아버지의 이야기를 통해 느낀 바가 있었다. 교인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목사가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자기의 상식으로 다른 사람을 판단해선 안 된다는 것도 이때 깨달았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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