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손인웅 <13> 장신대 첫눈에 원칙 없어 보여 저항의식 꿈틀

주일성수 않고 산업시찰에 학내 시위… 출석 교회는 덕수교회로… 운명적 만남

[역경의 열매] 손인웅 <13> 장신대 첫눈에 원칙 없어 보여 저항의식 꿈틀 기사의 사진
서울 정동에 있던 덕수교회 전경. 손인웅 목사는 1964년 장신대 신대원에 입학하면서 이 교회에 출석했다.
서울 생활이 시작됐다. 낯선 도시였다. 늘 부모님 생각이 났다. 새벽부터 한밤중까지 근면 성실하고 정직하게 사신 분들이었다. 그런 부모님의 성품이 신앙생활과 결합됐다. 늘 나를 돌아보는 삶을 살았고 부끄럽지 않으려 노력했다. 교회는 서울 정동에 있던 덕수교회로 정했다. 교회와 나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미 신학교 1학년 때 시작된 것이었다.

1964년 3월 2일이 신학교의 첫 날이었다. 월요일이었다. 예배를 드리고 하루 일찍 서울에 도착했다. 기차를 타고 서울역까지 와 버스를 몇 번이나 갈아타고 천호동으로 갔다. 천호동에선 강 건너 신학교가 보였다.

천호동에서 하루 자고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학교로 갔다. 광진교를 건너 광나루를 향하는 길이 무척 운치 있었던 기억이 난다. 아차산 중턱에 있는 아담한 학교를 보며 ‘저곳이 바로 내가 신학 수업을 들을 곳이구나’ 생각했다.

우리 기수는 모두 30명이었다. 학사원 1기들의 학벌은 꽤 좋았다. 서울대 출신이 여러 명이었고 연세대와 고려대를 비롯해 나 같은 지방 국립대 출신도 많았다. 하지만 큰 대학에 다니다 온 동기들의 눈에 비친 장신대는 너무도 초라했다. 캠퍼스가 초라한 건 둘째 치고 뭔가 원칙이 없어 보였다.

우리가 누군가. 1960년 4·19혁명을 경험한 이들 아닌가. 잠자고 있던 저항의식이 꿈틀거렸다. 그러다 사달이 벌어졌다. 박정희 대통령은 취임하자마자 대학생들을 산업현장으로 보냈다. ‘산업시찰’이라는 명목이었지만 일종의 견학 프로그램이었다. 우리학교에선 학생회장이 시찰단에 발탁됐다. 그런데 학생회장 선배가 시찰을 떠난 날이 하필이면 주일이었다. 이게 기폭제가 됐다.

“신학생이 어떻게 주일성수를 하지 않고 산업시찰을 갈 수 있느냐.” 구호가 선지동산에 가득 찼다. 1학년을 중심으로 학내시위가 시작된 것이었다. 당시 학생과장은 김규당 교수였다. 면담도 여러 차례 진행됐다.

“교수님. 어떻게 신학생을 주일에 산업시찰 보내실 수 있습니까. 그걸 가는 학생회장은 정상입니까.” 학생과장은 흥분한 우리를 달랬고 품어 줬다. 그리고는 며칠 후 채플에 설교자로 나서셨다. 설교 제목은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였다. 주일에 산업시찰을 보낸 것에 대해 우회적으로 사과를 한 것이었다. 시찰 중이던 학생회장도 서둘러 학교로 돌아와 학생들 앞에서 사과했다. 정부에도 불만이 많았던 우리들은 학생회장이 다시 시찰단으로 돌아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신학교의 현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매일 시위만 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몇 명이 의기투합했다. “우리 잡초부터 뽑자. 그리고 나무도 심자. 환경미화를 우리가 해보자.” 누가 시킨 것도 아니었는데 조를 짜서 캠퍼스 관리를 시작했다.








여름방학을 앞두고 선교팀을 조직해 전국 각지로 흩어지기로 했다. 나도 친구 3명과 함께 거제도 다대교회로 내려갔다. 호주 선교사였던 변조은 목사가 우리를 맞아 주셨다. 그때 우린 변 선교사의 랜드로버 자동차를 타고 거제도 곳곳을 누볐다. 열정이 넘치던 시절이었다. 온 동네가 선교지였다. 주변 학교에선 여름성경학교를 열었고 밤엔 야학교사로 활동했다. 낮엔 마을을 순회하면서 전도를 했다. 그러다 믿지 못할 일이 벌어졌다. 정리=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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