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도포럼-이재열] 딜레마 정부, 시스템부터 바꿔라 기사의 사진
개혁 과정에서 불특정 다수 미지근한 박수보다 기득권 집단 저항이 더 크고 격렬
독일 하르츠 개혁처럼 나라 미래 위해 진보정부가 정권 잃더라도 노동개혁 해야


인수위원회 없이 출범했음에도 문재인정부는 준비된 모습으로 보였다. 비선 실세와 문고리 권력에 둘러싸인 박근혜 전 대통령에 대한 실망과 분노가 컸던 국민은 재킷을 벗고 와이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채 비서진과 청와대 경내를 산책하며 커피 타임을 갖는 대통령의 여유에 청량감을 느꼈다. 참여정부 비서실장 출신 대통령, 그리고 당시 내각과 청와대에 참여했던 이들이 대거 재등장했기 때문에 ‘참여정부 2기’라 불렀지만 집권을 경험해본 이들이니 시행착오는 반복하지 않을 거라 기대했다. 그러나 1년 하고도 7개월이 지난 지금 기시감이 강하다. 참여정부의 딜레마들이 다시 반복되고 있다.

첫째는 ‘단기처방’과 ‘장기효과’ 간 딜레마다. ‘참여와 분권’만큼 ‘공정과 포용’은 이상적이다. 그러나 목표가 이상적일수록 단기 해법이 나오기 어렵다. 문제가 구조적이고 고질적인데, 단기적으로 성과를 얻으려 할수록 목표로부터 멀어진다. ‘소득주도성장’이나 ‘비정규직 철폐’가 그렇다. 급격히 최저임금을 올리고 정부 예산으로 공공일자리를 늘리며, 소수의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기는 쉽다. 그러나 이런 생색내기로는 왜곡된 임금시스템이나 신분 차별과도 같이 분단된 고용시스템을 바로잡기는 더 어려워진다. 문 대통령의 인천공항 발언 이후 봇물 터진 정규직화 요구 시위나 일자리 나누기를 목표로 한 ‘광주형 일자리’에 대한 노동계의 어깃장 놓기에서 보듯 감당할 수 없는 요구는 앞으로 더 강해질 것이다.

둘째는 이념성과 전문성 간 딜레마다. 참여정부에서는 젊은 486 진보 ‘어공파’와 보수적 관료 ‘늘공파’가 충돌했다. 선명한 개혁성을 내세우면 전문가 인재군이 배제됐고 ‘영혼 없는’ 관료를 내세우면 선명성이 사라졌다. 문재인정부 청와대를 채운 것은 그동안 성숙해진 586이리라 기대했지만 동시 퇴진한 김동연 경제부총리와 장하성 청와대 정책실장 간 갈등을 보면 달라진 게 없다. 개혁적이고 이념적이지만 경륜이 부족한 참모진과 전문적이고 경험이 풍부하지만 현실적인 관료 간 충돌은 경제정책이나 외교안보정책에 모두 잠재해 있다. 전문성을 살려 장기효과를 살리면 좋겠는데, 이념적으로 선명한 목표를 단기적으로 달성하려다 보니 딜레마는 더 커졌다. 장기효과를 보려면 멀리 보는 안목의 시스템 개혁이 필요한데, 개혁에는 이득을 보는 불특정 다수의 미지근한 박수보다 기득권을 잃는 집단의 격렬한 저항이 더 크기 마련이다.

그래서 잘되는 나라 특징은 친노동정권이 노동개혁에 앞서고 친자본집단이 재분배에 앞선다는 점이다. 2003년 시작한 독일의 하르츠 개혁은 노동시장 유연화와 탈규제로 개혁을 주도한 진보적 슈뢰더 정권이 권력을 잃는 계기가 됐다. 그러나 10년 후 독일이 높은 성장률과 고용률을 자랑하는 유럽의 강자로 부상하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미국의 최고 전성기였던 1960년대에는 고세율·고평등·고성장이 공존했는데, 이는 70%가 넘는 소득세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1930년대 고소득층의 정치적 지지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과거 고도성장기 한국의 성공비결 중 하나는 부문 간 높은 제도적 호환성이었다. 단순하지만 위계적이고 일사불란한 조직 원리는 정부 정책, 기업지배구조, 교육제도, 노사관계, 훈련제도 등에 걸쳐 상동 구조를 이뤄 전체 시스템 효율성을 높였다. 장인(匠人) 전통이 없는 한국에서 수십만 기능공을 일시에 배출해 세계 수준의 중화학 공업화를 이룬 비결이기도 하다. 그러나 외환위기 이후 급조된 개혁의 결과 부문과 제도 간 호환성은 깨지고, 시스템은 분절됐다. 시장 자율을 표방하되 관치가 여전한 정부 정책, 강성 노조의 철옹성에 기대 고용세습까지 챙기는 대기업 정규직과 같은 일을 해도 임금은 절반도 안 되는 중소기업 비정규직이 공존하는 분단된 노동시장, 한 번도 제대로 된 사회적 합의를 낳지 못한 노사정 협약기구, 고졸자를 모두 수용해도 남아도는 대학 정원, 대졸자의 절반밖에 수용하지 못하는 화이트칼라 일자리, 반면에 지원자가 없어 외국인 연수생으로 채워야 하는 중소기업의 생산직 일자리 등.

제한된 소수의 정규직화가 아니라 분절된 고용시스템을 통합하는 것이 근본 해법이다. 교육과정 개편이 아니라 교육과 고용 간 시스템 불일치를 줄이는 것이 근본 해법이다. 현재 한국경제 경쟁력의 발목을 잡는 가장 큰 요인은 제도적 불일치와 분절이다. 혁신, 공정, 포용을 목표로 하는 정부라면 생색내기 단기 해법 대신 기득권의 양보를 끌어내고 시스템을 혁신할 결의와 장기 계획부터 내놓아야 한다. 더구나 공공연히 ‘20년 진보 집권’을 주장하는 정부라면.

이재열(서울대 교수·사회학과)
트위터페이스북구글플러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