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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창림의 명화로 여는 성경 묵상]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전창림의 명화로 여는 성경 묵상]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기사의 사진
1430~1432, 나무에 템페라, 194×194㎝, 스페인 프라도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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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제단화는 프라 안젤리코가 누가복음 1장 26~38절에 기록한 대로 천사 가브리엘이 마리아에게 수태 사실을 알려주는 장면을 그린 것이다. 주제 그림들을 보통 ‘수태고지’ 또는 ‘성모영보’라고 한다. 수태고지는 수많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장면이다. 프라 안젤리코가 그린 수태고지들이 가장 걸작으로 꼽는 이유는 그의 회화적 예술성도 뛰어났지만 그의 인격과 신앙에서 이런 걸작들이 탄생했기 때문이다.

천사와 마리아 모두 경건하며 겸손하게 서로에게 몸을 굽혀 경의를 표하고 있다. 둘 다 후광을 가졌으나 천사는 하늘의 빛을 몸에서 뿜고 있다. 날개를 접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제 막 갑자기 내려온 것을 보여준다. 마리아의 무릎에 책이 놓여 있는데, 천사가 나타날 때 마리아는 성경을 읽고 있었으며, 마침 이사야서 7장 14절을 읽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아치의 줄에 제비가 앉은 것은 복음이 시작된다는 뜻이며, 해에서 비춰 들어오는 빛살은 하나님의 은혜가 임했음을 나타낸다. 그 햇살에 그려진 비둘기는 성령을 뜻한다. 수태고지라는 그림에는 종종 이렇게 두 인물 사이에 기둥이 나타나는데, 이 기둥은 하나님이 애굽에서 유대 백성을 구해내실 때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을 상징하며 또한 예수의 곧바른 삶을 상징한다. 기둥 위의 부조에는 이사야의 얼굴이 보인다. 이사야서 7장 14절은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이미 이사야 선지자가 처녀의 몸으로 예수를 낳을 것을 예언했고, 이제 그 예언이 이뤄지는 순간이다. 전체적으로 구성이 짜임새 있고 당시의 최첨단 미술이론인 선원근법도 구사하고, 색을 쓰는 감각도 상당히 뛰어나다.

수태고지 장면을 가장 자세히 묘사한 성경이 누가복음 1장 26~38절이다. 이에 따르면 처음엔 마리아가 당황했다.(29절)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하나님의 은혜를 입었다고 하니 놀랐고, 그것이 무슨 뜻인지 생각했다.(29절)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자(31절),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쩐 일이냐고 질문한다.(34절) 그리고 위대한 순종이 뒤따른다.(38절) 천사 가브리엘과 마리아의 사이에 5개의 단계가 있다. 당황-숙고-고지-질문-순종, 이 5개 과정은 마리아의 신앙과 하나님의 말씀이 만나서 위대한 역사가 시작되는 숭고한 순간이다. 이 순간 말씀의 육화(incarnation)가 일어났다. 마치 5개의 과정에 응답하듯이 밑에는 마리아의 일생이 그려진 작은 그림 5개가 있다.

왼쪽 끝에 정원 풍경이 보이는데 아담과 이브가 에덴동산에서 천사에 의해 쫓겨나는 광경을 그렸다. 왜 수태고지에 아담과 이브가 나타날까? 프라 안젤리코는 예수님이 세상에 오시는 이유가 우리의 원죄 즉, 아담과 이브가 지은 죄 때문이라는 것을 상기시키고 있다. 아담과 이브 위의 천사는 그들을 쫓아낸다기보다는 따뜻하게 인도하는 듯이 보인다.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마리아여 무서워 말라 네가 하나님의 은혜를 얻었느니라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마리아가 가로되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사 7:14, 눅 1:26~38)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린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 1387~1455) 도미니코 수도사가 되면서 ‘기도 디 피에트로’라는 세례명을 받았다. 수도원에 있으면서 청빈하고 겸손하며 신심이 깊어 ‘축복 받은 천사’로 불릴 만큼 존경을 받았다. 그가 어디서 그림을 배웠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미사용 책의 삽화를 그리다가 제단화를 그리는 화가로 발전했을 것이다.

그는 원근법과 색, 빛의 사용과 입체적 표현기법 등 선구적 기법으로 시대를 앞선 뛰어난 화가였다.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들은 예술적인 차원을 넘어 깊은 기도와 묵상의 길로 이끈다. 서양미술사는 그를 가리켜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발자취를 그리기 위해 그리스도와 함께한 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안젤리코는 특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그릴 때 눈물을 흘렸으며, 자주 무릎을 꿇고 그림을 그렸다고 한다.

<홍익대 바이오화학공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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