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명희의 인사이트] 아름다운 퇴진 기사의 사진
“1996년 1월 제 나이 마흔에 회장 자리에 올랐을 때 딱 20년만 코오롱의 운전대를 잡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나이 60이 되면 새로운 인생을 살아보자고 작정했습니다. 시불가실(時不可失). 지금 아니면 새로운 도전의 용기를 내지 못할 것 같아 떠납니다. 우물쭈물하다 더 늦어질까 두렵습니다. … 새 일터에서 성공의 단맛을 맛볼 준비가 돼 있습니다. 까짓것, 행여 마음대로 안 되면 어떻습니까. 이젠 망할 권리까지 생겼는데요.”

내년 1월 1일자로 코오롱그룹 회장직에서 물러나 창업의 길을 가겠다고 선언한 이웅열 회장이 얼마 전 직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이다. 이 회장은 금수저를 물고 태어난 것을 부인하지 않지만 그만큼 책임감의 무게도 컸다며 이제 그 특권도, 책임감도 내려놓겠다고 했다. 그러면서 숱하게 변화를 외쳐 왔지만 자신이 바로 걸림돌이었다며 그룹의 새로운 도약을 이끌어낼 변화를 위해 떠난다고 했다.

정상에서 결코 내려놓기 쉽지 않았을 특권들을 뒤로한 채 ‘청년 이웅열’로 돌아가 가시밭길을 걷겠다고 선언한 이 회장의 호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금방 사그라질 신기루 같은 부와 권력을 쥐기 위해 아등바등하는 게 인지상정(人之常情)이다. 가진 자들은 더 갖기 위해, 범인들은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으로 물질의 노예로 살아가곤 한다.

퇴임을 앞둔 김동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국장 시절부터 ‘감사할 줄 알고 물러설 때를 아는 공직자가 되고 싶다’고 늘 말해 왔다. 그는 오래전 싸이월드 개인 홈페이지에 스스로 공직생활에서 물러날 때에 대한 경구를 올리기도 했다. ‘비전을 제시하지 못하거나 또는 스스로 비전이 없어질 때, 일에 대한 열정을 느끼지 못하고 문득 무사안일에 빠지자는 유혹에 굴할 때, 문제를 알면서도 침묵할 때, 문제의 해결방안을 엉뚱한 곳에서 찾는 무능력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노안처럼 느끼게 될 때, 잘못된 정책을 국민을 위한 것인 줄 알고 고집하는 확신범이란 생각이 들 때.’

가슴에 품고 다니던 이 경구처럼 그는 30여년 공직생활을 하면서 세 번 사의를 표명했다. 기재부 차관 시절 정치권이 포퓰리즘 복지공약들을 쏟아내자 재정 추계를 발표해 선거관리위원회로부터 기관경고 문책을 받았다. 그때 책임지겠다고 사표를 냈지만 반려됐다. 박근혜정부에서 국무조정실장을 하다 두 번째 사표를 냈다. 최저임금 인상 속도조절론이 받아들여지지 않고 악화된 고용지표가 발표된 지난 8월 중순에도 사의를 밝혔었다. 그를 두고 자기정치를 한다거나 정치적 야망이 있다는 색안경을 낀 시각도 있지만 나는 그의 올곧은 소신과 강직한 결기를 믿는다.

만 70세 정년을 7개월 앞당겨 퇴임하고 연고도 없는 경남 거창으로 최근 낙향한 이재철 100주년기념교회 담임목사의 고별설교도 큰 울림을 준다. 그는 “오늘을 거침없이 버려야 새로운 내일을 얻을 수 있듯, 낡은 부대를 거침없이 버려야 새 포도주를 담는 새 부대를 지닐 수 있듯이 이재철을 적당히 버리지 말고 철저히 버리라”며 30여년 살던 양화진을 떠났다. 은퇴 후 교회 옆에서 산다면 후임 목사들에게 걸림돌이 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다. 이 목사는 “오랫동안 평당 10만원 하는 땅을 알아보던 중 2013년 암 투병할 때 어렵게 땅을 구했다. 우리 부부는 돈을 모으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이 땅을 매입해줬고 대출을 받아 집을 지었다”고 했다. 기독교계에 공공연한 ‘퇴직금’을 한 푼도 받지 않은 것은 물론 퇴임 후에도 원로목사 등의 직함으로 교회에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거나 교회 세습 문제로 구설에 오르는 일부 목회자들과 비교되는 행보다.

지난 9월 돌연 담임목사직을 내려놓고 아프리카 케냐 선교사로 떠나겠다고 선언한 50대의 진재혁 지구촌교회 목사는 또 어떤가. 사랑하는 아들 이삭을 번제로 드린 아브라함의 마음처럼 힘들고 어려웠지만 모든 것들을 다 내려놓고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케냐의 어두운 영혼들을 향해 믿음의 길을 떠나려 한다는 그의 고백에서 쉽지 않은 결단이었음이 느껴진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의 질타처럼 눈이 어두워져 공문서를 읽지 못하고 허리가 굽어도 명예와 이익을 탐하며 자리에 연연하는 게 우리네 모습이다. 안락한 자리를 내려놓고 험지를 찾아 인생 2막을 시작하는 이들에게 존경과 박수를 보낸다.

종교국 부국장 mh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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