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장윤재] 만물의 끝이 다가왔으니 기사의 사진
기독교는 세상의 ‘시작’이 있었으니 ‘끝’도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기독교 신학에서는 이를 ‘종말론’이라 부른다. 하지만 종말론만큼 숱한 오해와 혼란을 불러온 교리도 없다. 과연 종말론의 핵심은 무엇인가.

사도신경은 세상의 ‘끝’에 예수님이 다시 오실 예정인데 그 목적은 ‘심판’이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이 심판에는 예외가 없다. “산 자와 죽은 자” 모두 심판하러 오시기 때문이다. 다행히 성서에는 이 ‘최후심판’의 모습이 예고되어 있다.(마태복음 25:31~46) 예수께서 다시 오셔서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영생의 복을 받을 무리와 영원한 불에 들어갈 무리로 구분하는데, 그 기준이 너무 뜻밖이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자매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고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다. 그것이 ‘심판의 기준’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우리 가운데 있는 ‘지극히 작은 자’와 동일시하셨다. 왜 그러셨을까. 성서의 한 구절이 이렇게 설명한다. “보이는 자기 형제자매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요한1서 4:20)

그렇다면 성서가 말하는 ‘최후의 심판’은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이미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심판의 기준은 이미 주어졌고, 심판의 목적은 결론지어졌다. 기독교의 종말론은 아직 오지 않은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여기’ 우리의 삶으로 눈을 돌리게 한다. 그게 진정한 종말의 신앙이다. 재림과 심판의 ‘현재적 의미’는 간과하고 ‘미래의 시점’에만 집중하는 모든 종파가 쉽게 사이비로 흐르는 것은 이 때문이다.

로마제국의 무자비한 박해시절, 초대 기독교인들 사이에 은밀히 건네지던 인사말이 있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이다. ‘당신의 죽음을 기억하라’는 뜻이다. 시제가 맞지 않는다. 죽음은 미래의 일인데 어찌 과거의 일처럼 기억하란 말인가. 이는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철저히 ‘종말의 신앙’을 살았는지 보여주는 말이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라디아서 2:20) 우리는 이미 죽었고 지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새 생명으로 영생을 얻었다. 그러므로 박해와 죽임의 위협 앞에 굴하지 말고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을 값지게 살아가자는 힘찬 다짐이고 격려였다.

미국의 한 대형 호텔에서 화재가 났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200여 명의 투숙객들이 절체절명의 순간 가까스로 구조되었다. 세월이 흐른 뒤 한 연구소가 당시 구조된 200여 명을 일일이 추적하여 사건 이후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조사했다. 당시 그 호텔에 투숙할 정도면 사회적으로 높은 명망과 재력의 소유자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 대부분이 완전히 다른 새 삶을 살고 있었다. 장애자를 돕거나, 말기 암 환자와 친구 되거나, 거리의 노숙자들에게 빵을 나누어주고, 또 빈민 지역에 들어가 무료 진료 활동을 펴는 것이었다. 그들은 화재 현장이라는 그 생지옥에서 이미 죽음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종말을 경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구조된 이후의 삶은 덤으로, 선물로 얻은 것임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들은 선한 사마리아인으로 살 수 있었다.

기독교의 종말론, 그것은 올바로 이해하면 세상의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에 관한 이야기다. 무서운 파국에 대한 예고가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 안에 있는 새 삶에 대한 희망이다. 다사다난했던 한 해가 가고 새 해가 온다. “만물의 마지막이 가까이 왔습니다. 그러므로 정신을 차리고, 삼가 조심하여 기도하십시오. 무엇보다도 먼저 서로 뜨겁게 사랑하십시오. 사랑은 허다한 죄를 덮어 줍니다.”(베드로전서 4:7~10)

장윤재 이화여대 교목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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