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래퍼 산이의 여성혐오 발언 사태를 보며 대학원생 오모(28)씨는 인터넷을 끊었다. 발단은 산이가 지난달 발표한 곡 ‘페미니스트’에서 비롯됐다. 그는 유튜브에 해당 음원을 올리면서 “여성을 혐오하지 않는다. 혐오가 불씨가 돼 혐오가 조장되는 상황을 혐오한다”고 썼다. 혐오에 반대한다는 취지지만 정작 신곡은 혐오 발언 범벅이었다. “합의 아래 관계 갖고 할거 다하고 왜 미투해? 꽃뱀?” “걔넨 좋겠다 몸 팔아 돈 챙겨”라고 했다.

온라인은 순식간에 전쟁터가 됐다. 상대 진영을 조롱하고 ‘비정상’으로 깎아내리는 공격이 각종 커뮤니티를 뒤덮었다. “정상적인 페미니스트는 없다” “(산이는) 도태된 ‘한남’의 전형적 표상”이라는 글들이 줄이었다. 해당 영상 조회수는 3일 만에 100만건을 넘겼고, 댓글은 보름 만에 3만개가 달렸다. 지난 2일 열린 콘서트에서 산이가 급기야 “페미니스트 노(No), 너넨 정신병”이라고 외치면서 사태는 오프라인으로도 번졌다. 이 과정을 지켜본 오씨는 “정상적인 대화는 온데간데없고 조롱 섞인 표현들뿐이었다”며 “나마저 정신이 이상해질 것 같아 한동안 인터넷을 끊었다”고 했다.

토론할 줄 모르는 사회의 비극

한국 사회가 ‘혐오 신드롬’에 빠졌다. 전문가들은 경제·사회적 불평등과 저성장 기조가 합쳐지면서 사람들이 희망을 잃었고, 이에 대한 분노와 무력감을 타인에게 무차별적으로 표출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갈등을 비폭력적으로 해소하는 민주적 절차가 부재하는 현실”(신광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이 결국 “토론할 줄 모르는 사회의 비극”(이영직 작가)을 낳았다는 지적도 나온다. 이들은 상대 진영을 악으로 규정하고 맹공격하는 일종의 ‘패거리즘’(패거리 문화)이 온라인 공간의 지배적 문화로 자리 잡았다고 분석했다.

특정 이슈와 결합된 혐오는 온라인 공간에서 급속도로 퍼진다. 국민일보는 9일 빅데이터 분석업체 데이터앤리서치에 의뢰해 이수역 폭행 사건 전후 한 달간 여성혐오 버즈량을 분석했다. 버즈량은 특정 키워드가 언급된 횟수를 일컫는다. 지난달 5일부터 지난 5일까지 네이버·다음의 블로그·커뮤니티·뉴스 댓글 게시판, 트위터, 인스타그램, 유튜브에서 여성혐오는 모두 23만7735번 언급됐다. 이수역 폭행 사건이 있었던 13일 직후 버즈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3~16일 언급량이 12만5756건으로 전체의 52.89%를 차지했다. 한 달간 부정적 감성(17만2371건)이 긍정적 감성(1만7417건)의 9.89배에 이르렀고, ‘혐오’(1만1463건) ‘욕’(5037건) ‘유난떨다’(4603건) 등 감정적 키워드가 많았다.

박태순 사회갈등연구소장은 “이전에도 갈등은 있었지만 여러 정제 장치가 있었고 확산 속도도 제한적이었다”며 “이제는 날것의 격렬한 언어들이 온라인에서 급속도로 퍼지면서 사회에 악영향을 끼치고 있다”고 진단했다.

다른 의견 듣지 않는 온라인 커뮤니티

혐오가 펼쳐지는 주된 무대는 온라인 공간이다. ‘이수역 폭행 사건’ ‘곰탕집 성추행’ 등 혐오 논란 대부분이 특정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시작됐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나와 생각이 다른 사람은 배척하는 ‘외딴섬’으로 전락할 위험이 크다. 전문가들은 생각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끼리 모이는 커뮤니티에서는 극단적인 의견이 형성되기 쉽다고 지적한다. 서수연 성신여대 심리학과(임상심리전문) 교수는 “신념이 유사한 사람들끼리 어울릴수록 해당 가치관이 확고해지는 현상을 ‘집단 극화’라고 한다”며 “이는 세상을 ‘우리’와 ‘그들’로 범주화하고 생각이 다른 집단을 공격하는 양상으로 이어진다”고 설명했다.

오프라인에서 집단 극화는 ‘믿거’(믿고 거른다)의 태도로 표출된다. ‘믿거’는 내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과는 관계를 맺지 않는다는 뜻의 신조어다. 박모(28)씨는 처음 만난 사람이 특정 드라마를 본다고 하면 거리를 둔다. 박씨가 활동하는 커뮤니티의 회원들은 남녀 주인공의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여혐 요소가 있다는 이유로 해당 드라마를 싫어한다. 박씨는 “이 드라마를 언급했을 때 상대방이 호의적으로 나오면 그 사람을 ‘믿거’한다”며 “더 알아보지 않아도 나랑 맞지 않는다는 걸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일부 커뮤니티에서는 ‘언금’(언급 금지) 규칙도 등장했다. 커뮤니티의 가치관이나 정치적 성향에 반하는 인물이나 TV 프로그램은 언급하지 말라는 것이다.

‘믿거’와 ‘언금’은 ‘토론할 줄 모르는 사회’로 이어진다. 설동훈 전북대 사회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모이는 ‘광장’ 같은 공간이 있어서 원치 않아도 다른 의견을 지닌 이들과 논쟁할 수밖에 없었다”며 “온라인 공간에서는 이런 교류 자체가 막혀 있다”고 분석했다.

“혐오 희생양 찾기 계속될 것”

전문가들은 혐오 현상이 당분간 이어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더 나은 미래를 상상하기 힘든 저성장·불평등 사회에서는 ‘나와 다른 집단’을 적대시하는 경향이 짙어질 거라는 분석이다.

윤김지영 건국대 몸문화연구소 교수는 “혐오란 구조적 불평등이 존재할 때 이에 대한 좌절감을 쉬운 희생양에게 푸는 것”이라며 “불평등은 단기간에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기 때문에 혐오도 앞으로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병태 카이스트 테크노경영대학원 교수도 “청년실업 등 과제가 산적한 상황에서 특히 ‘사회 자원을 남녀에게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둘러싼 논쟁은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내다봤다.

이재연 안규영 기자 jayle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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