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전철] 인간의 죽음 기사의 사진
3일간 장례식장에 있었다. 산 자와 죽은 자는 헤어지는 시간을 준비한다. 이 세상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죽은 자는 이 땅의 삶을 완성하고 마감한다. 그리고 어딘가로 새롭게 떠난다. 그가 엄마의 양수에서 나와 처음 세상의 빛을 본 순간, 평생 몸에 피를 돌리며 뛰었던 심장, 누군가를 사랑하며 뛰었던 그 마음, 자연을 보고 느끼고 감각하였던 신체, 희노애락의 고단한 감정이 어딘가 켜켜이 쌓였을 법한 몸. 그의 전 인생과 역사를 지탱해 왔던 마음과 몸은 불구덩이에서 저렇게 활활 타오른다. 그리고 한 줌의 재로 변모하여 우리 앞에 있다. 죽음이란 무엇인가.

우리와 눈빛을 나누었던 그는 어느 곳으로 떠났을까. 그의 고단함, 생의 기쁨, 우리와 나눈 사랑의 교감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을까. 인간의 짧은 지식의 열쇠로 열 수 없는 문을 그는 죽음으로 열고 도대체 어디로 떠난 것일까. 그가 우리 마음에 남는다는 답은 죽음에 대한 유일한 답일까. 우리도 언젠가는 그들처럼 사라진다. 오늘은 나의 차례이고, 내일은 너의 차례이다(hodie mihi cras tibi). 그렇다면 우리의 인생과 죽음의 보증은 다가올 우리 후대의 기억과 전승뿐인가. 완벽하게 뼛가루로 해체되어 우리를 압도하여 변모한 저 인간의 마지막 모습에서 우리는 숨 막히는 자연의 적막함을 경험한다. 살아있는 이 자연은 수많은 이들의 삶과 죽음의 바람결이 그려내는 환영이었을까.

생명을 개인 신체의 단위로만 해석하면 죽음 이후 남는 것은 한 줌의 흙, 혹은 죽은 자에 대한 산 자들의 아련한 기억일 뿐이다. 생명이 물리 화학적으로 완전히 해체되어 먼지처럼 사라지는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우리가 매일 만나는 삶과 죽음에 대한 적절한 이해일까. 혹은 영원히 깨지지 않는 유리알과 같은 영혼의 상태로 어디에서인가 존재한다면 이는 또 얼마나 이해하기 어려운 사변인가. 인간은 탄생하고 소멸한다. 그러나 유한한 인간의 삶에도 불구하고 소멸하지 않고 영속하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는 얼마나 나와 자아의 단위를 넘어 삶과 생명과 죽음의 문제를 지혜롭게 헤아리고 있는가. 왜 우리는 나만을 위한 감각, 욕심, 욕망, 세계만을 자명하고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는가. 왜 우리는 삶과 죽음, 그리고 그를 관통하는 가치를 가볍게 다루는 것일까. 생명에 대한 자연학적, 사회문화적, 종교적 성찰은 더 가깝고 긴밀하게 직조되어야 하지 않을까. 이 성찰에서 소멸하는 것과 소멸하지 않는 것, 그리고 살아있음의 가치와 의미를 더욱 잘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한 인간의 삶이 온전히 회색 가루가 되어 봉인된 함은 살아있는 이들에게 이 세상의 본성과 질감을 근원적으로 묻는다. 죽은 그에게 이 세상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의 세계에서 영원히 봉인되어 우리로부터 사라졌다. 어쩌면 남아 있는 우리는 이 세계도 모르고 죽음도 모른다. 적막하게 흐르는 자연의 무상함과 침묵, 그리고 우리 생활세계와 내면에 거칠게 안착된 조잡하고 인공적인 욕망과 관념들.

생명, 죽음, 십자가, 부활, 그리스도, 구원, 사랑, 하나님은 단순하고 허망한 종교적 상상력의 산물은 아니리라. 이는 지금도 추락에도 불구하고 구원을 끊임없이 찾는 인간의 소망이다. 그리고 추락하거나 상승하는 인간의 죽음을 직시하는 신을 향한 간절한 믿음이다.

이 겨울, 병상에서 생명의 마지막 호흡을 하는 이웃들을 기억한다. 태어날 때부터 병상에 머물다 열두 달 짧은 생을 마무리하고 12월 우리를 떠난 교인의 아기를 기억한다. 차가운 컨베이어 벨트에서 12월 사망한 24살 꽃다운 청년 김용균의 죽음을 기억한다. 주님,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지요. 세상은 대림절 주님의 오심을 기다린다. 만신창이가 된 우리의 부끄러운 삶과 서글픈 죽음과 깊은 슬픔의 잿더미에서 새로운 희망과 창조를 여시는 주님을 기다린다.

전철(한신대 교수·신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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